눈부신 가족사진
예뻐져라, 예뻐져라. 거친 내 손을 잡고 딸아이가 정성껏 매니큐어를 칠해주었다. 2주쯤 지나자 손톱 끝부터 매니큐어가 벗겨지기 시작했다. 부엌일에 밭일까지 마다하지 않는 손이니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고 손을 내어놓기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 살아온 날들의 땀과 때를 담고 있는 손이다. 별 공로는 없지만 소임을 감당해왔으니 그저 측은하고 조금은 대견한 눈으로 바라본다. 때 타고 낡은 것들의 귀중함을 조금씩 눈치 채는 요즘이다.
코로나 사태로 오랜만에 몇 달째 함께 지내고 있는 가족의 시간 속, 그 가장 평범한 풍경에 애틋한 마음이 든다. 소파 아래 떨어져 있는 양말 한 짝이 눈에 띨 때 싱긋 미소를 띠게 된다. 아침에 거실에 나가면 테이블 위에 먹다 남은 간식이나 읽다가 덮어놓은 책이 놓여있다. 무릎덮개가 소파 위에 널브러져있다. 눈살 찡그리기보다는 오히려 정겹다. 서로 등 두드려주고 가끔 티격태격하는 가족이라는 이름의 소소한 모습이다.
고상한 인테리어에 조명이 섬세한 미술 전시관 같은 집도 좋다. 그러나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먹고, 쉬고, 일하는 집이라는 공간은 역시 약간 어질러진 모습이 제격이다. 베란다에 벗어놓은 낡은 신발 한 짝이 삐딱하게 놓여있는 모습도 좋다. 그 위로 다른 슬리퍼 한 짝이 걸쳐있거나 누군가 뛰어 들어간 듯 뒤집혀 있어도 좋다.
문득 직장 동료가 불쑥 내밀었던 말끔한 글 한 편이 떠오른다. 어디서 들어본 듯한 윤기 나는 언어들이 마음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바깥 언저리에서 서성댔다. 소재였던 슬픔이 사치스럽게 느껴지는 건 어쩐 일인지. 멋스럽게 쓰기 위해 눈물을 가린 것은 아닐까? 척하는 것을 감출 수 없으니 글쓰기는 무서운 일이다.
나는 어떤 글에 감동하는가? 그것은 개인의 경험이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언어로 표현되어 있을 때다. 눈물이나 때, 절망 같은 만만치 않은 상대들과 치열히 씨름하여 그들을 자신만의 구체적 언어로 다시 빚어냈을 때다. 그렇게 빛나는 실을 술술 뱉을 때까지 아무래도 나는 많은 날 뽕잎으로 살을 찌워야 할 것 같다.
살아가는 날의 때와 시름, 그리고 그 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리는 감사와 기쁨이 우러난 글엔 위로가 있다. 얌전히 차려입은 귀공녀 같은 글엔 때 묻은 내가 기댈 데가 없다. 변명 없이 나의 때를 정직하게 들여다보는 일에는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한 걸까?
거라지 세일에서 산 튼튼한 건조대 위에 가족의 옷이 빼곡히 널려있다. 겉옷, 속옷, 수건, 마스크, 양말. 손님이라도 들이닥친다면 얼른 걷어야 할 물건들이 가족이기에 허용되는 거리로 모여 있다. 때를 잠시 벗어낸 그들은 조만간 다시 건조대 위에 오를 것이다. 그래야 악취를 면할 수 있는 우리다. 그래도 서로 코를 잡고 돌아서지 않고 한 건조대 위에 여전히 나란하다. 여름의 한낮, 뜨거운 햇살 받은 양말들이 하얗게 빛을 낸다. 한 장의 눈부신 가족사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