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웃지 않는 가족사진 그러나 (1-6)

우린 서로를 향해 웃지 않았다.

by 소명작가
남동생 100일 기념


이 사진을 찍던 날을 기억한다. 엄마는 늘 그렇듯 나를 향해 소리를 질렀다. 머리 빗으라고 부랴부랴 앞머리를 빗었다. 그리고 애기 옆에 가서 서라고 평소 익숙한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살던 집 안쪽 담벼락이었다. 막내의 의자 위에 밍크 담요라고 쓰인 빨간 담요를 얹고 막내를 앉혔다. 후에 알았다. 그날이 태어날 걸 보았던 막내의 백일이었다. 그 막내가 10월에 태어났으니 그날은 1월의 엄동설한이었을 것이다. 가족사진을 찍은 후 남동생은 저 두꺼운 옷을 벗기고 사진을 다시 찍었다. 그때 백일 사진은 나신이 유행이었으니까.


낯선 카메라 기사 아저씨가 나에게 의자 위에 손을 올리라고 했다. 시키는 대로 난 손을 올렸다. 카메라 아저씨가 이리저리 주변을 정리를 하는 내내 집안의 셋째인 여동생은 자지러지게 울었다. 엄마가 500원짜리 지폐를 손에 쥐어 주면서 울지 말라고 달래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얼굴이 빨개지도록 목놓아 울었다. 아마도 무서웠나 보다. 낯선 사람과 낯선 기계 그리고 낯선 광경이 그랬나 보다.


그런데 이상한 건 엄마의 사랑을 앗아간 집안 장남인 남동생이 저리 슬픈 표정을 한 이유는 도통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나는 이 남동생이 늘 미웠다. 엄마가 싸고돌면서 나를 대하는 것과 다르게 귀히 여기는 티를 내었기에 늘 미웠다. 자라는 내내 많이 싸웠다. 둘 다 지기 싫어하는 막상막하의 성격이 늘 뒤엉켰다.


화난 얼굴의 엄마. 엄마는 이때까지만 해도 긴 생머리였다. 아직 30이 되지 않은 젊고 앳된 엄마의 모습이 보인다. 저 시절 나는 엄마의 미소를 보거나 웃음소리를 들은 기억이 없다. 셋째의 요란한 울음소리와 함께 즐겁지도 다정하지도 않은 모습이 고스란히 잡힌 우리 가족사진 사진


아무도 웃지 않는 가족사진 화난 엄마 울고 있는 여동생 사진사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약간은 아래쪽을 보는 남동생 천진난만하게 그저 무표정하게 존재하는 막내 그리고 여동생 표현에 의하면 우리 집안의 꽃이었던 나. 기억나진 않지만 엄마가 신경 써서 입힌 옷인 듯하다. 집안의 꽃이었던 나도 웃지 않았던 이 사진. 이 사진은 그저 매일 이런 분위기의 우리 삶의 단면이었다. 우린 웃지 않았던 게 아니라 웃어본 적이 없어서 웃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난 그 어린 시절 집에서 웃어본 기억이 없으니까


왜 아빠는 사진에 없을까


하숙생 마냥 씻고 나가는 모습만 보았다. 사진 속에 없는 건 너무 당연하다고 여겼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랑 집에 둘이 있을 시간이 있었다. 가족사진 앨범을 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내가 물었다. ”아빠, 왜 이 사진에 없어요?” ” 사진사 옆에 있었다. 종태 백일이라고 내가 집에 모시고 왔다. 난 그 옆에 있었다.” ”들어오시지.”

그랬다. 우리 삶의 울타리에는 늘 아빠가 있었다. 이 사진이 우리에게 남아 있는 이유도 아빠가 사진사를 모셔왔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그리고 8년 후 우린 다시 모였다. 중학생이 된 나는 두발 자유화로 머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었지만 긴 머리만은 허용되지 않았다. 작은 엄마가 운영하던 미용실에 갔는데 새로 미용 기술을 배우는 언니가 실습하느라 나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커트를 해 버렸다. 소심한 성격에 화도 못 내고 집에 와서 엉엉 울기만 했다. 백일이던 막내는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그 동생은 이 사진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1982년 5월 5일 어린이날이었다. 그래서 엄마는 우리 4형제를 데리고 동네 공원에 놀러 간 사진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역시 아무도 웃지 않는 아빠가 안 계신 가족사진이었다. 막내의 표정조차 찡그러저 있다. 햇빛을 마주 사진 찍는 건 나도 그 동생도 힘들어했다. 아마도 4형제가 다 그랬던 것 같다. 막내는 엄마의 온정으로 기억하는 사진인 듯했다. 왜 우리 가족사진은 웃지 않냐는 문자에 엄마가 어린이날이라고 공원에 데려간 거라고 말했다.


그랬다. 엄마가 상냥하지는 않았지만 늘 우리를 사랑하신 흔적의 사진이었다. 나는 한 번도 끼니를 거른 적 없었고 매일 아침 따스한 밥을 먹었다. 매일 정한 시간에 식사를 했고 명절이면 예쁜 옷을 입었다. 몇 달간 모아둔 비상금을 꺼내 우리를 양품점으로 데리고 가서 원 아동복 옷을 사주셨다. 동네 마실을 가도 식사 시간에는 어김없이 따뜻한 밥을 지으셨고 국과 반찬을 만드셨다. 엄마는 옷을 사거나 신발을 샀던 기억이 없다.


공무원의 작은 월급으로 우리를 먹이고 입히고 하느라 아가씨 적 바지를 입느라 아랫배에 힘주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간신히 훅을 걸고 지퍼를 올리고 숨을 내 쉬면 바지와 배 경계선에 3자 무늬가 생기곤 했다. 엄마는 바지를 입는 게 왜 맨날 저리 힘들지 생각만 했지 그것이 우리를 키우느라 절약하시느라 옷 한번 변변히 마련하지 못한 거라 생각지 못했다.


엄마 아빠의 환대


보이지 않았다. 내가 원하던 빛깔이 아니여서 그랬나보다. 이제는 보인다. 아빠는 사진 속에 계시지는 않았지만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출장 사진사를 불러오셨다. 그 당시 드문 칼라 사진으로 기록이 남을 수 있었던 건 아빠의 수고 때문이었다. 엄마도 어린이날 우리를 데리고 공원으로 나섰다. 사진 속 엄마는 자주 입지 않던 블라우스와 주름 잡힌 통바지를 입고 있다. 몸배가 아니었다. 조끼도 입으셨다. 사진에는 언제나 우리 4형제를 환대한 엄마 아빠의 마음이 담겨 있다.


평생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게 하셨다. 그냥 아빠라고 불러하고 하셨다. 거리감이 느껴진다고 하셨다. 늘 거리가 너무 멀었던 분인데 본심을 아니셨나 보다. 그런 아빠가 시한부 선고를 받았다. 팔순 잔치를 거하지는 않지만 조촐하게 끝낸 후 병원에서 길어야 6개월이라고 했다. 폐에 생긴 암 때문이었는데 수술해도 안 해도 같은 시기에 사망하실 거라서 수술은 권하지 않는다고 의사가 분명하게 말했다. 예전에는 수술도 했지만 예후가 좋지 못했다고 한다.


6개월 전에 미리 팔 순 생신을 위해 한국에 다녀왔지만 남은 생을 더 편히 보내시게 하고 싶은 마음에 입국을 서둘렀다. 아버지에게 분명한 병의 예후를 말씀드리지 않아서인지 나의 입국 소석이 아버지에게는 불안감을 높이기만 했다. 노골적으로 내가 죽냐며 오지 말라고 하셨다. 평생을 아빠는 그 누군가에게도 져 본 적이 없지만 나에게는 번번이 지신다. 이번에도 내가 이겼다. 쫓겨날 것을 걱정했지만 기어이 난 아빠 집으로 코로나를 뚫고 고향 보건소 직원에게 민폐를 끼치며 아버지 집에 당도했다.


14일 자가 격리 중에는 같이 있는 사람과 반드시 1M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고 했다. 늘 한국에 도착하면 이런저런 사람 만나느라 아빠와 식사 한 끼 하룻밤 잠이 전부였는데 코로나 19 때문에 지인을 만날 수도 없었다. 그 당시 미국은 코로나가 퍼질 대로 퍼진 코로나 왕국이었기에 나의 귀국은 모든 가족과 한국 사람들에게는 거의 재앙이었다.


그 덕에 아빠와 많은 대화를 나눌 시간이 있었다. 가족 앨범을 놓고 이야기를 하면서 이 사진에 대한 자세한 배경을 들을 수 있었다. 왜 이 사진에 아빠가 없냐고 물었다. 우리 삶에는 늘 아빠가 없었다고 말했다. 예상치 못한 대답을 하셨다. 난 사진사 옆에 서 있었다. 그 사진사는 시청의 전담 사진사였는데 막내 백일 사진을 찍기 위해 모시고 온 것이라고 했다. 그래 이 사진에는 없지만 늘 아빠는 우리의 일상에 함께하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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