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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명작가 Mar 30. 2024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 실격>

요조의 개성화는 과연 실패인가?


개성화 (individuation)

인간은 태어나면서 그 누구도 아닌 자기만의 꽃을 피운다. 이것을 칼 구스타프 융은 개성화(individuation)라 불렀다. 


개성화(individuation)란 한 사람이 자신의 전인적인 자아상을 깨닫는 과정이다. 자기의 무의식 속에서 잠자고 있던 자기만의 상처와 아픔, 좌절 ,소외, 불안의 감정들을 인생을 사는 동안 전부 의식으로 끌어올려 그 모든 것을 내면 속에서 수용하고 성장하는 과정을 말한다.  타인에 의해 사회에 의해 혹은 국가의 이념이나 사상에 의해 만들어진 자신이 아닌  원래 자신을 찾아가는 모든 행위를 개성화라고 부른다. 


<인간 실격> 특징


나는 그 사내의 사진 세 장을 본 적이 있다(프롤로그)
부끄럼 많은 생애를 보냈습니다. (소설 첫 구절)



다자이의 유교작이 된 <인간 실격>은 이런 개성화의 과정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위의 인용 구절은 그 유명한 프롤로그와 소설의 첫 구절이다. 


<인간 실격>은 자신에 대한 성찰과 의식을 끌어내는 솜씨가 매우 뛰어난 작품이다.  내용이 어둡지만 쉬지 않고 단숨에 읽힌다.  그만큼 문장력 뛰어나다. 이제는 세계적인 작가가 된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존경하는 소설가가 바로 이 다자이 오사무라고 그의 책에서 밝힌 바 있다.  이 작품은 일본을 비롯해 일본의 문학이 터부시 되는 한국에서도 엄청난 인기를 끈 작품이다.  그 이유가 2차 세계 대전에서 패망한 후 공황상태에 빠진 일본 젊은이들의 의식을 절묘하게 포착해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포스트 모던 시대에 구심점이 사라진 때 성장한 21세기 청년들도 이 책의 주인공 요조의 삶과 비슷해서 이런 인기를 시대를 넘어 누리는 게 아닌가 추측해 본다. 

이 책은 일본의 유명한 소설가 다자이 오사무의 자전적 소설이다. 그의 본명은 쓰시마 쓔지 (津島修治)다. 그는 1909년 6월 16일에 태어나 1947년 6월 13일 폐 질환이 악화되고 정신 병동에 갇힌 충격으로 한 여인과 저수지에 몸을 던져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가족 관계


아버지는 부호 가문에 데릴 사위로 들어와 돈으로 벼슬을 사서 정계에 진출한다. 그래서 그는 어린 시절 내내 경제적으로 풍요한 환경에서 성장한다. 그의 어머니는 몸이 약해 저자의 성장을 돌보지 못해 유모의 손에서 자란다. 가끔 아버지가 도쿄에서 와서 자녀들과 교류를 나누지만 그 아버지 또한 어린 그에게는 낯설고 무서운 아득한 존재였을 뿐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프랑스 문학에 관심이 있던 그는 도쿄 대학 불문과에 입학한다. 문학을 공부하던 중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학교를 중퇴한다. 이후 소설가 이부세 마스지의 문하생으로 들어가 흔히 알려진 다자이 오사무라는 필명으로 작가로 활동을 시작한다. 



많은 작품들이 상을 받고 유명 작가가 되는 듯하지만 치료에 사용하던 진통제 주사로 인해 약물 중독에 빠진다. 1939년에는 스승 이부세 마스지의 중매로 이시하라 미치코와 결혼 후 잠시 안정된 생활을 하며 많은 작품을 쓴다. 하지만 결혼 생활도 파탄으로 끝나고 결국은 폐 질환이 악화되어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하다가 저수지에 몸을 던져 그의 생을 끝낸다. 



<인간실격> 내용


그는 서문에서 자신의 유년 시절, 학창 시절, 그리고 성년 시절의 사진 세 장을 비교하며 자신을 묘사한다. 자신을 객관적으로 묘사하기 위해 3인칭 시점을 가져와 프롤로그를 기록한다. 책을 두 번째 읽기 위해 프롤로그를 다시 읽을 때 알았다. 이 소설의 끝이 인생을 포기하는 것으로 끝날 것임을 암시해 놓은 부분이란 걸 



그는 자신 스스로 인간 실격이라 부르며 인간으로 실격이 되어 가는 과정을 그린다. 하지만 그 책을 읽는 내내 그를 향해 나쁜 인간, 자격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나의 유년 시절의 의식과 맞닿으면서 그의 고통이 무엇인지 오히려 짐작이 가능해졌다. 


그에게는 가족도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묘사된 가족 식사 분위기는 마치 제례를 올리는 예식처럼 침묵과 엄격한 규율이 요구되었다. 아버지와의 관계에서도 자신의 속마음을 드러낼 수도 절대로 들켜서도 안 되는 관계였다. 


엄마는 아예 글 속에 등장도 하지 않는다. 그의 의식 속에 엄마는 존재하지도 않았다. 부모의 보호가 사라진 부잣집 말째에 속한 도련님은 오히려 분풀이나 놀림의 대상이었다. 자세한 묘사가 나오지 않지만 그는 집안에 일을 도와주는 사람으로부터도 묘사하기 힘든 학대를 받는다. 


중요한 타인이 없다. 자아를 인식하게 도와주는 중요한 타인이 그의 일생 동안 존재하지 않았다. 부잣집이고 타고난 머리 덕분에 인생을 무난하게 사는 듯 보이지만 그의 영혼에 맞닿은 절망과 외로움을 알아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그는 계속 나락으로 떨어지기만 한다. 첫 자살 시도도 굳이 죽을 이유를 찾기 힘들어 보이지만 자살하려는 여인과 함께 자살을 시도한다. 의식을 차렸을 때는 그는 이미 살인 방조자라는 낙인과 함께 자살을 시도했던 질문조차 받지 못한 채 오히려 가문에서 내쳐지는 징계를 받는다. 


창 시절 사회의 묵인으로 자행되던 난잡한 삶도 바로잡아주는 이가 곁에 아무도 없다. 오히려 그를 더 그런 삶으로 유인하는 사람들만 존재할 뿐이다. 사랑하는 이를 만나 결혼도 해서 잠시 안정된 삶을 사는가 싶지만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사랑하는 아내마저 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잃어버리고 만다. 


마지막 폐병을 치료하기 위해 요양소로 데려간다는 말을 듣고 들어간 곳도 요양소가 아닌 정신 폐쇄병동이었다. 그의 삶에 진정한 보호자는 어디에도 없었다. 자신을 둘러싼 거짓된 삶의 행보들 속에 그는 계속 자살을 시도한다. 그러다 결국 성공한다. 



일본이라는 사회 


오랫동안 이웃나라로 인식하며 살지만 내 시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기괴한 면들이 존재한다. 자살을 대하는 그들만의 방식도 그러하다. 다자이 오사무도 5번의 자살 시도 속에 보이는 행보는 절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와 내 삶은 그래도 옳다는 고집스러운 면도 보인다. 자살을 통해 그의 그러한 삶이 옳았음을 오히려 증명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것이 일본의 자살을 바라보는 시각이기도 하다. 

일본이라는 나라와 한국이라는 나라에서는 한 개인이 개성을 표현하며 자신을 찾는데 그다지 도움을 주는 나라가 아님에는 틀림이 없다. 학교에 가서 제일 먼저 배우는 단어는 우리나라 대한민국이다. 라는 단어를 배우지 못한다. 나를 찾아가는 것이 용납되지 않는 두 나라다


이런 분위기는 한 개인의 삶은 끊임없이 공동체를 위해 존재하라는 필연적 요구를 받는다. 자신의 삶에 사회 집안 국가의 굴레가 씌워진 채  그들을 빛나게 하는 존재로 개인이 존재하기를 요구받는다. 그 속에서 한 개인의 내면을 찾고 개성을 찾는 행위의 마지막이 불행일 거라는 건 쉽게 예상될 수 있는 것이다. 



개성화 

자기가 왜 이 땅에 와서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떠나야 하는지를 자신이 찾아가는 과정. 그곳이 일본이 아니었더라면 오사무는 어떤 개성화를 피워냈을까? 가문에서의 축출은 그나마 남아 있던 자기 만을 꽃을 피우려던 마지막 힘마저 끊어내어 버려진 게 아닐까 조심스레 짐작해 해본다. 뿌리에서 잘린 가지는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바람직한 개성화의 과정이 주어졌다면 이 소설의 결말은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의 결말이 안쓰럽다. 그렇게 살다간 그의 생에 마음이 쓰인다. 나도 별반 다르지 않기에  그에 대한 연민이 더 크다. 






<인간 실격> 저자는 이 제목을 통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그가 이름 붙인 <인간 실격>이라는 제목은 궁극적으로 그를 둘러싼 가족, 사회, 국가의 실격을 오히려 더 고발하는 제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는 이 제목을 통해 마음속으로 외치던 내가 왜 이렇게 살아야 하나 하던 질문을 그는 죽음을 통해 우리에게로 다시 돌려준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사는 지금 여기에도 그와 같이 이가 존재하지는 않는지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본다. 내 곁에 있는 한 개인이 스스로의 가치와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날마다 애쓰며 살아야 하는 것이 나의 개성화를 제대로 피워내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다자이 오사무에 대한 다른 시각>


어둡고 암울하기만 할 거라는 그의 생애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갖게 해 주는 글을 만났다. 다자이 오사무의 작품을 더 읽고 싶다는 욕구를 갖게 만든 글이기도 하다. 이 글을 쓴 유숙자 번역가는 다자이 오사무 때문에 일본으로 건너갔고, 결국은  도쿄 대학에 입학해 일본 문학에 대해 공부를 했다고 했다


“국내에서 <인간 실격>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어둡고 나약한 문학세계가 다자이 문학의 전부인 양 받아들여지는 경향이 있어요. 하지만 그의 15년간 문필 생활은 놀랄 만큼 다채롭고 깊이 있는 스펙트럼을 보여주고 있지요. <달려라 메로스>는 독자가 ‘다자이 작품 맞아?’라고 느낄 만큼 유머 넘치고 타고난 이야기꾼으로서 다자이 매력을 듬뿍 느낄 수 있는 단편집이에요. 독자들이 일본 근대문학을 더 가깝고 폭넓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작품을 소개할 때, 그것이 좋은 반응으로 나타날 때, 힘들지만 번역가로서 큰 보람을 느낍니다.”


유숙자  번역가가 평가하는 다자이 오사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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