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후 기차역 근처 약국에서 처음 취직했을 때였다. 졸업생 대다수는 병원 처방전 조제 중심의 약국에서 첫 번째 직장을 구하는데 나는 당시에 일반 매약을 배우는 게 중요하다 생각해 매약 중심의 약국에 지원하게 되었다. 첫 출근이 확정되고 괜히 걱정되는 마음에 어슬렁거리며 약국 근처를 슬쩍 둘러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손님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았고 의외로 한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너무 많을까 봐 걱정되었던 역 주변 유동인구도 적당한 수준으로 보였다.
대망의 첫 출근날, 마치 이 날을 위해 기다려온 사람처럼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약국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막상 사람들을 맞이하게 되자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되어있었다. 그동안 배워온 지식들은 하나둘씩 무너져가는 느낌이고 사람들은 그런 나를 불신의 눈으로 쳐다보는 듯하였다.
다행히 약국장님과 나에게 인수인계를 해줄 근무약사 한분이 친절하게 실무에 관련한 내용을 하나씩 집어주셨고 덕분에 깜깜한 밤에 한줄기 불빛의 의존해 그 길을 따라갔다.
역 주변은 멀리서 슬쩍 둘러보았을 때보다 훨씬 사람이 많이 오가는 곳이었다. 특히 지하철도 지나는 곳이라 각양각색의 다양한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게다가 기차역 특성상 노숙자도 꽤 많이 볼 수 있었다.
노숙자는 내 인생에 있어 대화를 나누는 일은 없다고 생각했었지만 여기에 근무하기로 한 이상 일주일에 두세 번은 노숙자와 대화 아닌 대화를 해야 했다. 사실 거의 일방적인 듣기에 가깝긴 했다. 그들에겐 나의 대답이 무의미하고 원하는 대답에만 반응을 했기에 나중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이는 정도로도 소통이 이루어졌다.
약국에서 처음 노숙자를 마주한 건 나 혼자 단독으로 약국에 있을 때였다. 근무 시작 2~3주 정도는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보 약사이기에 약국장님과 전임 약사님이 함께 근무를 서주셨다. 근데 그들이 잠시 자리를 비울 때마다 노숙자가 약국에 들어와서 이것저것 묻는 것이었다. 대부분 쓸데없는 질문이었지만 약사로서의 긍지를 가지고 알고 있는 지식들을 친절하게 전달해주었다.
그런데 웃긴 건 한 명한테 설명을 해주면 다음번엔 다른 한 명이 와서 비슷한 질문을 하는 것이었다. 나를 놀리는 걸 알아차리지도 못하고 상세히 설명만 해주었는데 어느 날은 약국장님이 조용히 나를 불러 말씀하셨다. “화장실 다녀오다 멀찌감치 봐도 너무 신입 초짜 티를 팍팍 내고 있으니 ‘간’을 볼까 싶어 계속 찾아오는 거 같은데.. 그러니 너무 힘 빼지 말아요”라고 하셨다.
그리고 아주 작은 꿀팁이지만 그들은 주워듣는 귀가 우리보다 훨씬 많기에 아무리 건강 상식과 약에 관해 설명을 해줘도 그들이 듣고 싶은 얘기 아니면 관심도 안 가지니 너무 애쓰지 말라고 하셨다.
처음엔 그 말을 듣고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들도 다 억울한 사연을 하나 이상 가진 사람들이 아닌가. 또 어디 가서 하소연할 곳이 없어 노숙을 하는 것일 텐데. 그 억울한 사연을 들어주진 못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건 잘 설명해주는 게 약사의 도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의도가 뻔히 보이기 시작하더니 때론 노골적인 요구와 어처구니없는 부탁을 하였다. 가령 돈을 빌려달라던지, 약을 공짜로 달라던지 대부분 금전과 관련된 것들이라 내 선에서 해결도 어렵거니와 듣는 것도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약국장님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게 되면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러나 모든 노숙자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비슷해 보여도 개성이 있고 특징이 있었다. 하는 행동과 패턴도 다 달랐다.
어떤 숙자 씨는(숙자 씨=노숙자) 오후 4시쯤 갑자기 베레모를 쓰고 나타나서는 열심히 운동을 한다. 마치 본인이 특수부대 출신이라도 된 듯 오버하는데 푸시업을 몇 개쯤 하고는 어디론가 경례를 하고선 사라진다.
또 어떤 숙자 씨는 일주일에 꼭 한 번은 옷을 차려입고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물론 본인 입장에선 최고의 복장 일지는 모르지만 불쾌한 악취가 나고 청결하지 못한 모습에 식당 사장님은 난색을 표할 만 하지만 하필 식당 손님이 뜸할 때만 오다 보니 내쫓진 못한 채 받아주었다. 아마 받아주지 않으면 행패를 부릴까 봐서도 그냥 얼른 먹고 가기를 기다리는 걸 수도 있겠다 싶었다.
이렇듯 개성이 넘치는데 또 이들을 가만히 지켜보면 서로 간 지키는 나름의 규칙이 있었다. 가장 중요한 규칙은 ‘주목받지 않기’ 이다. 예를 들면 역무원 입장에선 숙자 씨가 딱히 반갑진 않아 내쫒고 싶은데 딱히 명분이 없어 내버려 둔다. 그러다 한번 소란이라도 피우면 철도경찰까지 출동해 소탕(?)해버린다. 그렇기에 빌미를 주지 않기 위해서라도 소란 피우거나 난동 부리는 숙자 씨는 그들 사이에서도 결격 사유가 되어 그들 나름의 커뮤니티에 받아주지 않는다.
어차피 홀로 길에 나온 사람인데 그게 뭐 대수냐 싶겠지만 한번 눈밖에 난 숙자 씨는 캐리어나 수레(?)를 끌고서 이리저리 전전하다 자리를 잡지 못하고 며칠 내로 어느새 사라졌다. 그들에게도 보금자리는 꽤나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슬기로워야할 숙자 생활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약국에 오는 숙자 씨를 구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단 한 가지만 꼽으라면 아마도 냄새일 것이다. 요즘은 무료급식소라던지 무료로 의복을 주는 곳이 생겨 피골이 상접하거나 옷이 다 해져서 다니는 숙자 씨는 거의 없다. 그러나 그들도 쉽게 해결하지 못하는 게 냄새다. 공용화장실 외에 그들이 씻거나 할 수 있는 공간이 없기도 하거니와 이미 인생의 일정 부분을 포기하다시피 한 그들은 청결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듯했다.
가끔씩 찾아오는 숙자씨들이 모두 다 무작정 싫은건 아니었다. 그리고 마냥 안쓰럽게 동정만 하지도 않았다. 때론 정말 약사가 필요해서 나를 찾는 경우도 있고(이제는 그런 걸 구분하는 안목을 장착했다), 그냥 사람 목소리가 고파서 불쑥 들릴 때도 있었다. 그런 분들은 대게 무례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심스러웠다. 그런 숙자씨들을 대할 땐 나도 더 정성스럽게 응대를 해주고 원하는 바를 만족시켜드렸다.
퇴직 이후엔 숙자씨들을 더 이상 약국에서 만날 일은 없었다. 역 근처에 볼일이 생겨 근방으로 가면 한 번씩 눈에 익은 얼굴이 보이는데 딱히 반갑지는 않았다. 약국 밖에선 나도 그들이 내 근처에 오지 않기를 바라며 얼굴을 찌푸리지만 혹여나 약국 안에서 그들을 다시 보게 된다면 친절하게 인사해야겠단 생각은 여전히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