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일을 하다 보면, 종종 수학 수능의 노가다 문제를 푸는 기분이 든다. 답은 이미 머릿속에 있는데, 아무도 그 답을 믿지 못한다. "전체를 봐야 확신할 수 있다"며 모든 경우의 수를 하나하나 대입하라고 한다. 조건마다 값을 넣고, 엑셀에 줄을 그어 정리하고, 화면을 모조리 캡처해 뿌려놓는 작업이 시작된다. 이쯤 되면 나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무의미한 과정을 견디는 수밖에 없다.
수학 노가다 문제의 특징은 이렇다. 문제의 본질은 간단하다. 최소값을 찾거나 조건에 맞는 해를 구하는 것이 목표다. 그러나 답을 얻기 위해 모든 경우의 수를 시도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조건 하나라도 빠뜨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장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기획 역시 그렇다. 내가 제시하는 안이 최적의 해답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음에도, 모두가 그 과정을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해한다. 결국, 수학 문제에서 '모든 값을 대입해 봐야 정답이다'라는 식의 논리가 기획에도 적용된다.
한편, 노가다 문제를 푸는 수험생의 심정은 이렇다. 계산 과정을 반복하며 점점 지쳐가지만, 멈출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과정을 보여주지 않으면, 아무리 답이 맞더라도 그 답은 인정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기획자로서의 내 현실도 같다. 화면 하나하나를 캡처하고, 프로세스 전체를 도식화하며, 불필요한 것까지 채워 넣는다. 그러면서도 개발자들이 반박할 틈을 남기지 않기 위해 끝없이 검증하고 또 검증한다. 그러나 그 과정은 언제나 과중하고 피로하다.
가장 답답한 건, 정작 이런 과정을 요구하며 오래 걸린다고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들은 그 결과를 제대로 보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은 화면을 일일이 들여다보며 그림을 이해할 생각도, 시간도 없다. 내가 완성한 자료를 단 한 번 휙 훑어보고는, "이건 아닌 것 같아. 방향을 좀 바꿔보자"며 새로운 요구를 던진다. 그렇게 한순간에 기획안은 무용지물이 된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이 과정을 반복하며 묻고 싶어 진다. "왜 처음부터 이 방향을 이야기하지 않았나요?"
기획은 수학 노가다 문제와 다르지 않다.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는 답을 증명하기 위한 작업의 연속이다. 문제는 그 증명조차 받아들여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나는 희망이 없는 기획에는 에너지를 쓰지 않는다. 하지만 희망이 있다고 믿고 매달린 기획조차 방향이 틀어질 때면, 내가 쏟아부은 시간과 노력의 무게가 허탈하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나는 기획자이기 때문에, 결국 설득하지 못한 내 잘못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답이 명확해도, 그것을 받아들이게 만들지 못했다면 기획이 제대로 기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단축키를 누르며 화면을 정리한다. 답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답을 모든 이들이 납득할 수 있도록 하는 것. 그것이 기획자의 숙명이라고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