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배경은 실력을 이겼다

by 메리
paratrooper-2727135_1280.png


메리는 직장생활을 하며 웬만한 일엔 놀라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하지만 그날, 사무실 복도에서 들려온 수군거림은 달랐다.
"민수가 본부장 애인 아들이래."


처음엔 헛소리인 줄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하나하나 맞아떨어지기 시작했다.
부장이 유독 민수에게만 관대한 이유.
실수를 해도 야단은커녕 커피나 한 잔 건네며 웃어넘기던 태도.
다른 직원들이 민수에게 말이라도 잘못 걸면 조용히 사라지던 그들.
전부 이상했다.


그리고 어느 날, 복사실에서 민수가 통화하는 걸 들었다.
"엄마, 오늘 전무님이랑 점심 먹기로 했어."


그 한마디로 퍼즐이 맞춰졌다.
전무, 즉 본부장이 민수의 엄마와 관계가 있다는 것.
그래서 그토록 민수를 감쌌던 거였다.


그 후부터 하나둘 기억이 이어졌다.
회식 자리에서 본부장은 민수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이런 애는 잘 키워야 해. 나중에 큰 인물이 될 거야."


그 말의 의미는, 단순한 격려가 아니었다.
그 아이를 위한 조직이 움직이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후부터 메리에게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먼저, 메리가 담당하던 프로젝트가 민수에게 넘어갔다.


"이건 민수가 경험 쌓아야 해서 그래."

“하지만 이건 제가 지난 6개월 동안 준비해온 건데요.”

“그러니까 더 좋은 기회지. 민수는 한참 배워야 할 때잖아.”


말이 되지 않았다.
부장은 점점 노골적으로 메리의 역할을 빼앗아갔다.
점심시간도 제한했다.


“밥만 먹고 빨리 들어와. 네가 여자 직원들이랑 노닥거릴 시간 없어.”

메리는 항의하지 못했다.
항의하면 일이 더 꼬일 걸 알고 있었다. 예전처럼.
그래서 참았다. 하지만 억울했다.

회사에 오래 있었고, 누구보다 열심히 일해왔다.
남자 직원들보다 실적도, 책임감도 뛰어났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민수가 '중심'이 되어갔다.
회의 때는 민수 의견이 먼저였고, 보고는 메리가 아닌 민수가 했다.


민수는 뒷배가 있으니 당당했다.
실수를 해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건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해결해 볼게요."


그리고 정말로 아무 일 없이 넘어갔다.
마치 누가 뒤에서 모든 걸 조정하는 듯했다.
실수의 책임은 그에게 닿지 않았고, 오히려 유연하게 대응하는 자세로 칭찬을 받았다.


민수는 부장이 아니라 본부장의 지시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직원들 모두가 느끼고 있었지만 아무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렇게 사내 분위기는 기묘하게 얼어붙어 갔다.

하루는 본부장이 직접 내려왔다.
전 직원들이 일어섰고, 본부장은 민수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 치며 웃었다.

“이번 건 네가 직접 보고해.”

메리는 멍해졌다.
그건 자신이 작성한 보고서였다.
자신이 기획했고, 조율했고, 작성한 문서.
민수는 손도 안 댄 업무였다.

민수는 머뭇거리다 말했다.

"메리 선배가 작성한 보고서인데…"

하지만 본부장은 민수의 말을 잘랐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아. 이제 네가 배워야 할 때야.”


그제야 확신했다.
이건 계획된 그림이었다.

며칠 후, 부장은 공개석상에서 메리를 향해 언성을 높였다.

"왜 민수한테 일을 안 주는 거야? 그 친구 성장해야 하잖아. 당신이 자리를 가로막고 있다는 얘기까지 들린다고!"

메리는 어안이 벙벙했다.
일을 안 준 게 아니었다.
주지 않은 척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부장은 민수를 보호하려는 듯 민감하게 반응했고,
사소한 일도 민수 편에 서서 메리를 압박했다.

그리고 승진 시즌이 되었다.
메리는 조용히 기대하고 있었다.
그동안 실적도 충분했고, 팀 내 중심 역할도 맡아왔다.

하지만 승진 명단에 메리의 이름은 없었다.
대신, 메리가 입사한 지 한참뒤에 들어온 민수가 포함되어 있었다.
민수는 들어온 지 채 2년이 되지 않았다.

회식 자리에서 본부장은 술잔을 들고 큰소리로 외쳤다.

"상고 나온 애를 승진시킬 순 없어. 우리 회사 레벨이라는 게 있잖아? 누구든 다 아는 거 아냐?"

메리는 숨이 턱 막혔다.
본부장 자신이 상고 출신이었고, 이름 모를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오히려 상고 나온 메리를 향해 손가락질을 했다.

메리는 상고를 나왔지만, 이후 서울 상위권 야간대학에 진학해 졸업했다.
모든 걸 포기하지 않고 노력해서 지금까지 버텨온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그런 모욕적인 발언을 아무렇지 않게 뱉는 본부장을 보며
메리는 분노로 입술을 꽉 물었다.

사람들은 눈을 피했고, 부서장까지도 웃음으로 넘겼다.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알아차렸다.
그 말은 곧 메리를 향한 발언이었다.

메리는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자기 편이 없었다.
다들 본부장의 눈치를 봤다.
잘못 보이면 자기 자리가 위험하니까.


기가 막혔다.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었다.
그런데, 나를 부르는 곳은 없었다.
이만한 월급 주는 곳도 없었다.
그래서 참았다.

본부장도 나이가 많았다.
얼마나 다니겠어, 5년만 참자.
그렇게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마음은 점점 말라갔다.
승진은 꿈이었고, 그것이 사라진 자리엔 허탈함만 남았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을까?’
그 질문만 되풀이되었다.

나는 열심히 일했고, 실수 없이 해냈다.
그러나 실력이 아니라, 배경과 입으로만 채워지는 자리라면,
나는 더 이상 무엇으로 증명해야 할까?

그날, 메리는 회사 건물 밖 벤치에 앉아 하늘을 바라봤다.
바람이 차가웠고, 마음은 얼어붙었다.

‘여기서 끝낼 순 없어.’

메리는 다시 조용히 마음을 다잡았다.
조용히, 그러나 절대 지지 않겠다고.

작가의 이전글9. 말하지 말고 살아라 – 조용한 싸움의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