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무너지지 않기 위한 침묵의 반격

말은 삼키고, 증거는 남긴다

by 메리



메리는 예전처럼 울지 않았다.
분노를 쏟아내지도 않았다.
다만 침묵했다.
그리고 행동했다.


그날 오후, 민수가 외부 미팅을 다녀온 뒤 자리에 앉아 중얼거렸다.
“회의실 예약은 왜 이렇게 헷갈리게 해놨어. 시스템이 이상한 거 아냐?”

회의실 시스템은 멀쩡했다.
이미 어제 메리가 정리해서 모든 팀원에게 공유한 일정표에도 분명히 명시되어 있었다.
하지만 민수는 그것조차 보지 않았다.
아니, 일부러 안 본 건지도 몰랐다.
실수를 인정하는 대신 시스템 탓을 했다.
그리고 그 말은 곧바로 부장의 귀에 들어갔다.

“회의실이 또 꼬였다고 하더라. 메리가 관리했지?”

부장은 대뜸 메리를 불렀다.
“왜 시스템 제대로 못 챙겨? 외부 손님 왔다가 회의실 없어서 엉망 됐다잖아.”


메리는 억울했다.
하지만 얘기하지 않았다.
아무리 설명해도, 결론은 ‘메리 잘못’이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부터 메리는 작고 단단한 행동을 시작했다.
메일은 모든 사람을 참조에 넣었다.
회의록은 전날 오후에 공유했고, 시스템 담당자에게는 캡처한 화면까지 보냈다.
누군가가 “안 봤어요”라고 말해도,
“보내드렸습니다. 14시에 전달했고, 파일은 이겁니다.”라고 답했다.

며칠 뒤 또 일이 터졌다.
민수가 발주 금액을 잘못 입력한 것이었다.
납품처와의 단가 협상이 꼬였고, 거래처 담당자가 정식 항의를 보냈다.
부장은 황급히 수습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날 오후, 메리 자리로 부장이 다가왔다.
“민수 자료, 너도 한번 검토했어야지. 왜 아무도 체크 안 한 거야?”

메리는 조용히 말했다.
“부장님, 저 이 일은 담당 아닙니다. 민수 사원 혼자 처리한 내용이고, 관련 메일이나 자료도 저는 받은 적 없습니다.”

그리고 프린트한 메일 캡처를 부장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부장은 말이 없었다.
메리는 웃지 않았다.
조용히 책상으로 돌아갔다.

누가 봐도 정당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부장의 눈빛은 점점 험악해졌다.

며칠 후 또 다른 일이 벌어졌다.
메리가 담당했던 기획안이 통과되자, 민수가 슬며시 끼어들었다.
“이 아이디어, 예전에 회의할 때 제가 말했던 거잖아요. 메리 선배가 그걸 정리해서 기획안으로 만든 거구요.”

사람들은 어정쩡한 눈빛으로 메리를 바라봤다.

“맞아요, 회의 때 아이디어 말씀 주신 거 기억합니다.
그 아이디어를 제가 구체화해서 자료화했어요.”

그렇게 말하고 넘겼지만, 메리의 속은 끓고 있었다.
기획안 전체는 그녀가 밤새워 쓴 것이었고,
민수는 그날 회의에서 딱 한 문장 던졌을 뿐이었다.

그래도 메리는 마음속으로 하루를 복기했다.
언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누가 무슨 말을 했는지 또렷이 되새기며 기억 속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
“잊지 말자. 언젠간 나에게 필요할 때가 올 거야.”
그 다짐은 어느새 메리에게 버팀목이 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메리에게 새로운 편이 생겼다.
IT팀 대리 석진이었다.
석진은 시스템 관련으로 자주 메리와 협업하던 사람이었다.
회의실 예약 이슈가 벌어진 날 이후, 메리에게 말을 건넸다.

“그 회의실 예약, 사실 어제 민수가 시스템에서 아무 데나 찍고 저장한 걸로 보여요.
로그에 남아 있더라고요. 혹시 필요하면 캡처해둘게요.”

“아, 정말요…? 너무 감사합니다.”

메리는 놀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석진은 웃으며 말했다.
“요즘 좀 이상하긴 해요. 괜히 메리님만 자꾸 꼬투리 잡히는 것 같아서.”

그 말 한마디에 메리는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위로가 됐다.

며칠 뒤, 메리는 민수의 요청으로 야근을 하게 되었다.
민수는 자긴 일정이 있어서 먼저 퇴근하겠다고 말하고,
야근 업무는 메리에게 넘겼다.

그런데 다음 날, 민수가 야근 수당과 택시비를 청구했다는 사실을 회계팀 지연이 알려줬다.
“이거 민수 사원 건, 어제 야근 기록이랑 택시비가 좀 이상한데요.
혹시 메리님이 확인하셨는지…”

메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확인할게요. 자료 부탁드려요.”

하루는 회의 중 민수가 말을 끊고 나섰다.
“메리 선배는 보고서 쓰는 속도가 좀 느려요. 그 부분은 개선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도 문제지. 요즘은 민수가 더 빠르더라.”

메리는 그 자리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밤, 자신이 제출했던 모든 자료 일자를 정리했고,
민수가 놓친 실수 리스트도 함께 정리했다.

며칠 후, 엘리베이터에서 IT팀 대리 석진과 마주쳤다.
석진이 말을 걸었다.

“메리님, 괜찮으세요?”

“괜찮아요. 잘 견디고 있어요.”

“혹시라도 도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주세요.”

짧은 말이었지만, 메리는 그 말에서 진심을 느꼈다.

그리고 며칠 후, 복도에서 조용한 소문이 메리의 귓가를 스쳤다.


“본부장, 이번에 짤린대.”

작가의 이전글11. 공든 탑도, 누군가의 입 하나에 무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