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디어, 나를 지우려는 손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본부장이 짤린다는 소문은 처음엔 믿기 어려웠다.
조용하게 퍼졌고, 누구도 확신하진 못했지만, 그 분위기는 분명하게 달라지고 있었다.
메리는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허튼 기대를 하다 또 무너질까 두려웠다.
하지만 사무실 안팎의 공기가 변하고 있었다.
늘 본부장의 눈치를 보며 웃던 부서장들이 요즘은 말을 아꼈다.
회의 시간에도 눈을 자주 깜빡였고, 누군가가 실수라도 하면 본부장의 눈치를 먼저 살폈다.
긴장이 서려 있었다.
민수는 그 변화에 더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렇게 당당하던 민수는 회의 중에 종이를 떨어뜨리고,
보고서 발표 중 말을 더듬는 일이 잦아졌다.
한 번은 메리의 자리를 슬쩍 엿보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급히 시선을 돌리기도 했다.
하루는 복도에서 IT팀 석진이 조용히 다가와 속삭였다.
"들으셨죠? 진짜래요. 본부장, 이번에 짤린답니다. 윗선에서 정리 중이라고 하네요."
메리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이게 정말 끝이라는 걸까?
하지만 직감적으로 알았다.
그렇게 쉽게 끝나진 않을 거라는 걸.
그 예감은 곧 현실이 되었다.
민수가 마지막 발악을 시작한 것이다.
며칠 뒤, 복사기 앞에서 메리는 이상한 보고서 한 장을 발견했다.
'팀 실적 요약'이라는 제목 아래, 낯익은 이름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신이 빠져 있었다.
그 보고서는 민수가 작성한 문서였다.
'1년간 핵심 기여자 명단'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었다.
민수 본인은 가장 위에 있었고, 메리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게 뭐지?"
메리는 눈을 의심했다.
이 프로젝트 대부분을 자신이 이끌었고, 주요 기획과 정리도 그녀 몫이었다.
그런데도 빠졌다. 일부러 지운 것이다.
그날 밤, 메리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간 민수가 저지른 크고 작은 행태들이 머릿속에 줄줄이 떠올랐다.
말도 안 되는 수당 청구, 허위 야근 기록, 메리의 기획안을 자기 아이디어처럼 슬쩍 끼워넣는 태도.
그리고 이제는, 존재 자체를 지우려는 시도.
"지금도 이런데, 본부장 짤려도 이대로면 민수가 올라가겠구나."
다음 날 아침, 석진이 조용히 말했다.
"어제 민수 보고서 말인데요. 누가 위에서 봤나봐요. 메리님 이름이 없다는 얘기 돌았어요. 다시 쓰라고 했답니다."
메리는 그 말에 작게 숨을 내쉬었다.
누군가는 보고 있다는 사실. 누군가는,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의 숨통을 틔웠다.
며칠 뒤, 메리에게 발표 기회가 주어졌다.
중요한 프로젝트의 진행 상황을 공유하는 자리였다.
메리는 모든 준비를 철저히 했다.
밤을 새우다시피 보고서를 정리했고, 예상 질문 리스트까지 만들었다.
발표 당일, 회의실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민수는 회의 시작 직전까지 뭔가 말하려다 고개를 숙였고,
부장은 평소와 달리 자리에서 물러서 있었다.
메리는 침착하게 자료를 열고 차분히 말문을 열었다.
"이번 분기 진행된 기획안 세 건의 성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정확하고 또렷한 발표였다.
질문에도 망설임 없이 답했고, 예상치 못한 지적에도 자료로 응수했다.
발표가 끝났을 때 회의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그리고 부사장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깔끔하네요. 이 프로젝트는 메리가 계속 맡으세요. 책임지고 마무리하시길 바랍니다."
그 말 한마디에 회의실의 온도가 바뀌었다.
민수는 굳은 표정으로 자료를 덮었고, 부장은 입을 꾹 다물었다.
메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날 저녁, 민수는 회식 자리를 피해 사무실을 떠났고,
부장은 종이컵에 커피를 따라 복도로 나가 담배를 피우는 듯 창밖을 오래 바라봤다.
그 모습을 뒤로하며, 메리는 속으로 되뇌었다.
"끝나지 않았어. 아직. 하지만 이제, 나도 쉽게 무너지진 않아."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석진이 조용히 메리 자리로 다가왔다.
"어제 발표 좋았어요. 혹시 말 안 하셔도 되는데... 누가 위에서 지켜보는 것 같지 않아요? 부사장도 그렇고."
메리는 조용히 웃었다.
짧고 작게, 그러나 확신에 찬 미소였다.
그날 이후, 메리는 조금 더 당당해졌다.
여전히 말을 아끼고, 다투지 않았다.
하지만 더는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실수도 인정하지 않았고, 억울함도 묻어두지 않았다.
대신, 묵묵히 정면으로 맞섰다.
민수는 혼자 점점 바빠졌다.
급하게 보고서를 수정하고, 자신이 말한 걸 또 설명해야 했고,
실수가 잦아지자 부서 사람들도 조심스레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민수는 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그날 밤, 민수는 혼자 프린터 앞에서 서성였다.
메리는 퇴근을 준비하며 조용히 그 모습을 지나쳤다.
그리고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제부터야. 진짜 싸움은."
그리고 천천히 불을 끄고 퇴근했다.
문을 나서는 발걸음이 단단했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그녀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있었고,
그녀 자신이, 자신의 존재를 지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