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난 선의 안부

by 사이

“우리 사귀기로 했다."


그 문자를 다시 읽고도, 나는 답을 하지 않았다.


손잡이를 당겨 현관문을 닫았다.

주머니 속 전화기가 한 번 더 울렸다. 화면에는 죽마고우 친구 이름이 떠 있었다.


바람이 불었다. 11월 바람이 이렇게 찼던가. 전화기를 오른손으로 옮겨 쥐었다.

골목을 나와 횡단보도 앞에 섰다. 녹색 신호등이 깜빡거렸다. 빨간 신호등이 켜지자 차들이 쉴 새 없이 밀려 나갔다. 한참을 기다렸다.


식당은 골목 안쪽에 있었다. 김이 얇게 앉은 유리문을 밀자 종이 울렸다. 음식 냄새와 함께 사람들 말소리가 낮게 흘렀다.


수진이 먼저 와 있었다. 창가 쪽 자리. 검은 코트를 벗어 등받이에 걸었다. 수진의 얼굴은 밝았다. 눈빛도 평소 같았다.


“왔어?”

“응.”


나는 의자를 당겨 앉았다. 젓가락을 포장지에서 꺼내는데 종이가 얇게 찢어졌다. 손끝이 조금 떨렸다.

우리는 메뉴를 골랐다. 제육볶음 하나, 김치찌개 하나.


“요즘 바빴지?”

수진이 물었다.


“시험이었잖아.”


“그렇구나.”


수진의 말끝이 짧게 잘렸다. 숟가락이 그릇에 닿는 소리가 옆자리에서 났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마셨다. 컵 벽을 따라 물방울이 천천히 흘러내렸다.


종업원이 냄비를 놓고 갔다. 불을 올리자 붉은 국물이 다시 끓어올라 거품이 가장자리에 조용히 밀려 모였다.

나는 숨을 골랐다.


“오늘… 그 얘기 좀 하자.”


수진이 나를 보았다. 눈동자가 흔들리지는 않았다.


“응.”


나는 휴대폰을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숨을 한번 내쉰 뒤 입을 열었다.


“그날, 축제 때 너랑 내 친구가 인사했잖아.”


“응.”


“오늘 낮에 그 친구한테 연락이 왔어. 둘이… 사귄다고.”


수진의 입술이 살짝 달싹거렸다. 국물 냄새가 조금 매웠다. 불이 은근히 타올랐다.


“미안해.”

그 말이 먼저 나왔다.


“그날 네가 바쁜 일이 있다고 먼저 갔고.. 끝나고 나가는데 네 친구랑 집 가는 방향이 같았어.. 그냥 같이 걸었어. 가는 길에 이야기 몇 가지 했어. 다음날 그 친구한테서 메시지가 왔고, 나도 답을 했어. 그게 며칠 갔어..”


“그래.”


수진은 뭔가 더 말하려다 입술을 한 번 다물었다.


“... 먼저 말하려고 했어. 네가 먼저 물어보기 전에. 타이밍을 찾았는데, 잘 모르겠더라.”


국물이 끓고 있었다. 찌개에서 후끈한 숨이 올라와서, 안경에 살짝 닿았다. 나는 안경을 벗어 소매로 닦았다.


“알겠어.”

생각보다 목소리가 낮고 단단하게 나왔다.


“너랑 나... 그동안 좋았어. 같이 걸었고, 같은 노래도 들었고. 내가 착각한 건가 싶기도 하고.”


“착각 아니었어.” 수진이 말했다.


“나도 좋았어. 근데, 사람 마음이... 이렇게 갈라질 수 있나 봐. 그런데 누가 잘못했다, 그 말은 못 하겠어. 다만, 말이 늦었지. 그건 알아.”


종업원이 국자를 놓고 갔다.


“먹자.” 수진이 말했다.


나는 찌개를 조금 떠서 밥에 얹었다. 뜨거웠다. 혀끝이 살짝 얼얼했다.

수진은 찌개 속 고기를 건져 내 그릇 가장자리에 놓았다. 버릇처럼. 예전에도 그렇게 했다. 나는 내 밥그릇 위로 시선을 떨어트렸다.


“고마워.”

“응.”


잠시, 숟가락과 젓가락 소리만 들렸다.


밖에서 비가 조금 내리기 시작했다. 유리창에 빗방울이 박혔다. 빗방울들이 흘러내려 선을 만들었다. 선들이 합쳐졌다. 그리고 흘러내려 사라졌다.


“그 친구는, 내 오래된 친구야.” 내가 말했다.


“알아. 네가 말했었지.”


“같이 자랐고, 싸웠고, 다시 놀았어. 지금도 가끔 밤늦게 서로 욕도 하고, 웃고. 그런 친구야.”


“그래서 더 미안해.”


“나도 이상하네. 질투가 그 친구한테 가야 할지, 너한테 가야 할지, 나한테 가야 할지. 계속 바뀌더라.”

나는 짧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 바보 같네.”


수진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네가 내게 고백하려고 준비했단 것도 알아. 느낌으로.”


“응.”


“그걸 생각하면 마음이 아파. 하지만, 내 마음이 지금 거기에 닿아 있지 않아서… 그걸 꾸며 말할 수 없었어.”


“그래. 꾸미지 마.”

답이 짧았다. 그게 낫다고 생각했다.


고개를 숙인 채 숟가락을 몇 번 더 움직였지만 밥을 다 먹지는 못했다. 불을 낮추자 종업원이 와서 꺼버렸다.

“계산은 내가 할게.” 내가 말했다.


“반반 하자.”


“그래. 반반.”


우리는 각자 지갑을 꺼냈다. 종업원이 건네주려던 영수증이 얇게 말려 손끝에서 멀어졌다.


문을 나섰다. 골목에는 비가 더 왔다. 가로등 불빛이 젖은 바닥에 깔렸다. 불빛에 사람들 발소리가 낮게 섞였다.


“집까지 데려다줄까?”


“아니야. 가깝잖아.”


“그래.”


나는 우산을 펴지 않았다. 코트 어깨가 조금 젖었다.


골목 입구에서 멈췄다.


“고마웠어.” 수진이 먼저 말했다.


“나도.”


“다음에… 다시 만나면, 그래도 인사하자.”


“그래. 인사하자.”


우리는 서로를 한 번 보았다. 길게 보지 않았다. 수진이 먼저 돌아섰다. 젖은 바닥에 찍힌 발자국이 이내 희미하게 지워졌다.

나는 반대쪽으로 걸었다. 전화기가 떨렸다. 친구였다.

바로 받지 않았다. 가로수 밑에 서서, 물방울이 이파리 끝에서 떨어지는 걸 보았다. 어두운 잎, 투명한 끝.

가슴에 손을 대보았다. 심장은 평소처럼 뛰었다. 대신, 속이 조금 비어 있었다.


나는 전화를 받았다.

“어.”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얘기 들었다.”


잠깐의 침묵. 비 소리.


“술 마실래?”

내가 물었다.


“지금?”

“지금.”

“가자.”


전화를 끊고, 우산을 폈다. 우산살이 탁 펴지자 고여있던 빗방울이 흩어졌다.

나는 골목을 빠져나왔다.


도시가 어둡고, 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