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를 합니다. 가볍게 쓰려고 일상의 먹는 이야기를 주로 합니다. 워킹맘 후다닥 뚝딱 밥상으로 시작했다가, 책 읽은 부분을 쓰기도 하고 암튼. 그래도 주요 테마로 잡는 것은 책과 음식인데. 이 음식 이야기가 얄궂어요.
내가 주로 먹는 것은 밥입니다. 된장찌개백반, 계란 프라이랑 밥, 꽈리멸치 볶음 반찬에 밥, 돼지고기 김치 찜에 밥. 그런데 자꾸 커피, 디저트, 특별한 외식 사진을 올리고 싶어져요. 사진도 백반보다는 디저트 쪽이 훨씬 '갬성'있어요. sns 속성이랄까요.
희한하죠. 내게 실질적으로 에너지를 주는 것은 밥인데, 기호품이 더 강렬한 느낌을 줍니다. 없어도 살 수 있는 것들. 그런데 없으면 인생 팍팍할 것 같은 것들. 카페, 커피, 멍 때림, 초코, 레이스, 쿠키, 과일 스무디…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을 보면 인간의 성장과 고매함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마음을 울리던 소설 속 문장 몇 개를 가져와볼까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다. 길의 추구, 오솔길의 암시이다.
모든 사람은 인간이 되기를 기원하며 자연이 던진 돌이다.
쾌적한 카페에서 진한 초코 브라우니를 포세이돈 삼지창 같은 포크로 한 입 베어 먹으며 차가운 아이스커피 마시면, 확실히 그런 것도 같아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요.
은은한 재즈음악 배경으로 푹신한 소파에 앉아있거나,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 앞에 앉아 사과 노트북을 펼치면, 확실히.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존엄이 손에 닿을 듯해요.
그런데, 회사 근처 자율 배식 식당에서 점심 먹는 사람들 보면 잘 모르겠어요. 정말? 인간이 그렇게 고매해? 하는 의문이 듭니다.
식판 위에 밥이랑 밑반찬, 고기반찬 등을 담아 각자 자리에 앉아 무표정하게 또는 조금 웃음 띤 얼굴로 식사를 하는 사람들. 밥알이 튀어나오기도 하고, 음식을 떨어뜨리기도 합니다. 밥 먹는 시간이라, 습관적으로 입에 무언가를 가져가 넣는 모습을 보면 잘 모르겠어요.
확률적으로 식사 시간이 카페 멍 때림보다 자주 발생하잖아요. 그래서 참 곤란해요. 인간의 존엄보다 누추함을 더 자주 마주치거든요.
몹쓸 상상력은 먹는 행위를 배출 행위로 연결시킵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명현상이기도 하거니와, 식당 바깥 골목 구석에서 나는 찌린내는 그런 연상을 부추깁니다. 생명의 기본이 먹는 행위와 배출 행위일진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고매함을 방해하는 것 같아요.
하긴. <데미안>에서 등장인물들이 뭘 먹는 장면도 없었던 것 같네요. 확실히 데미안이나 데미안의 엄마 에바 부인은 식사 장면이 없었어요. 이슬만 먹고살 것 같은 존재랄까요. <이방인> 뫼르소가 인간쓰레기 같던 옆집 청년과 순대에 와인을 먹던 것에 비하면 좀 다르긴 하네요.
저녁식사 후 설거지를 앞에 두고 생각합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 끝없이 반복되는 “먹고, 치우고, 싸고”. 이 생명활동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무슨 의미를 만들 수 있을까. 그래서 오늘 무슨 의미를 찾아 먹을 수 있을까. 의미는 얼어 죽을 그냥 사는 거야라고 말하고 싶진 않아요. 그럼 너무 삶이 누추하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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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스스로 밥을 차려먹는 40대는 알고 있습니다. 가정식 백반이 바탕이 되어야 플랫 화이트와 초콜릿 쿠키의 가치가 더 높아진 다는 것을. 밥 배 비우고 디저트 배만 채우면 배 아파요.
내 밥을 넘어서 식구 밥상까지 차리는 저는 알고 있습니다. 식구들이 뭘 먹는 모습은 누추하지 않고 사랑스럽다는 것을... 식구가 미울 때에는 하나도 안 사랑스럽겠지만서도...
아. 이렇게 싱겁게 결론 낼 수 있던 거네요, 나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먹고 싸는 생명 행위는 고매하다. 의미는 나에게 의미있는 존재로부터 찾는 걸로. 누추해 보이는 그들도 누군가에게는 의미있을테니.
오늘의 뻘 생각은 이쯤 정리할까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