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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ㅑㅇ Mar 15. 2023

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상황

<지킬앤 하이드> 지킬 박사가 어스시의 게드였다면




이름이 아주 중요한 세상이 있다.


어슐러 K. 르 귄의 소설 <어스시의 마법사>의 세상이다. 지킬과 하이드 얘기의 배경이 되는 1800년대 후반 영국 런던과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 책을 보는 내내 어스시의 마법사 첫 번째 이야기가 떠올랐다. 타고난 자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다가 그림자를 문 밖에 풀어놓게 되고, 그 공포스러운 그림자의 정체를 풀어가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그랬던 것 같다.


어스시 Earthsea 세계에서는 사물의 진짜 이름을 아는 것이 마법의 시작이다.

그 세상에서 이름은 누군가 흔히 불러주는 수단 그 이상의 뜻이 있다.


이름은 그 존재의 속성이다.


어스시에서 사물의 이름은 궤뚫어보는 자만이 알 수 있도록 감춰져있고, 진짜 신뢰하는 친구끼리만 자신의 이름을 공유한다. 불러주는 별명이 아닌 진짜 본질적인 이름을 공유하는 것은 서로간의 신뢰의 표현이자 상호간 속박을 뜻한다, 그 곳에서.  



Unsplash - chuttersnap



<지킬 박사와 하이드씨의 기이한 이야기>에서도 이름은 특별하다. 어스시와는 좀 다른 의미에서 특별하다.


각 등장인물에 부여된 이름은 상당수가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만들어냈다. 이름들에 캐릭터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리고 이름들이 그 자체로 이야기를 이룬다.


등장인물 4인의 이름을 둘러보자.



첫번째 이름은 어터슨 Utterson 이다. 언급하다 Utter와 아들 또는 사람을 뜻하는 Son이 합쳐진 이름이다. 어터슨은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이 만든 이름같다. 그의 이름 가브리엘 Gabriel도 신의 전령역할을 하는 천사 이름과 통한다. 직업도 말하는 직업, 변호사이다. 그는 헨리 지킬의 유언장에 상속인으로 하이드가 지정된 것에 의구심을 갖고 있었고, 지킬 박사와 래니언 박사의 편지를 독자에게 열어보인다.



두번째 이름은 엔필드 Enfield. 어터슨의 친척으로 거리의 어떤 문을 보면서 책에서 처음 하이드 얘기를 꺼내는 인물이다. 엔필드는 한밤중에 길을 걷다가 아이를 무참히 밟고 지나가는 하이드를 불러세워 그가 저명한 지킬 박사의 수표책을 사용하도록 했다. 그래서 하이드와 지킬 박사 사이에 관계가 있음이 만천하에 드러난다. 하이드를 이야기 마당으로, 필드로 끌어들이는 인물인 셈이다. 큰 비중없이 지나치는 인물인데 강력하다. 리차드 엔필드, Richard에는 '강력한' Powerful 이란 뜻이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인 성공한 외과의사 헨리 지킬 박사 Dr.Henry Jekyll. 흔해 빠진 이름 헨리 Henry에도 뜻이 있다. 이름 검색 사이트에 따르면 '집안의 지배자' Ruler of the home. 내 정신의 핵심을 이루며, 자아를 관리하는 에고 Ego와 통한다. 지킬은 유명 정원사의 이름에서 따왔단 얘기도 있고, 자기 파괴자를 뜻한다는 얘기도 있다. 책을 함께 봤던 V-Club 톡방에서 나온 얘기다. 자기 파괴자는 프랑스어에서 나를 뜻하는 Je와 영어로 죽이는 행위를 말하는 kill이 합쳐진 단어와 발음이 같다는 데에서 착안한 아이디어다.



네번째, 지킬의 분신인 하이드 씨 Mr.Hyde. 숨다, ~을 숨기다, 은신처를 뜻하는 Hide와 발음이 같다. 헨리 지킬은 그 자신으로부터 하이드를 분리해냄으로써 본인의 명성과 품위를 유지하면서도 자유로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고 기뻐했다. 결과적으로 하이드는 숨어 있어야만 하는데, 점점 커진 그가 더 이상 숨어있지 않으면서 잘 되진 않았다. 감춰지지 않는 한 하이드는 존재할 수 없는 운명이었던 것이 아닐런지.



마지막 헤이스티 래니언 박사 Dr.Hastie Lanyon. 헨리 지킬과 마찬가지로 의사다. 그는 헨리 지킬이 하이드를 분리, 변신할 수 있도록 자극을 준 촉매제다. 지킬과 래니언은 뿌리깊은 입장 차이가 있었고 과거의 언젠가 자존심 대결을 한 것 같다. 헨리는 내 안의 금지된 욕망을 분리시켜 자유롭게 살 수 있다, 헤이스티는 말도 안된다가 그 대결의 요지였을 듯 하다. 어터슨은 하이드에 대해 알아보고자 지킬과 친하게 지낸 래니언에게 가보지만, 그는 지킬이 말도 안되는 이상한 것에 빠져서 절교한지 10년 가까이 되었다고 말한다.

이름 사이트에서 Hastie는 옛 영어이름 중 하나로 근엄하고 금욕적인 사람의 아들을 뜻한다고 한다. Son of the austere man. 지킬은 하이드가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와 곤란에 처했을 때 래니언에게 편지로 약을 가져다 달라고 도움을 요청하고, 그에게 자신의 변신 모습을 보여준다. 래니언 박사는 여기서 받은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어터슨에게 편지를 남기고 죽는다. 그게 죽을 정도의 충격이었나 싶었지만, 그의 이름에 새겨진 뜻을 보면, 그의 근간이 흔들리는 사건을 목격했으니 그럴 수 있겠다 싶다.


이름이 참 많은 것을 말해주는 책이지만. 이 책에서 이름 붙여지지 않은 몇 가지가 있다 !



My nameless situation.

지킬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놓고 명명할 수 없다고 언급했다.



친애하는 어터슨,

이 편지가 자네 손에 들어갈 즈음에 나는 사라지고 없을 것이네. 이것은 내가 미리 예상치 못한 상황 때문이네. 하지만 종말은 확실하게, 또 빨리 올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네. 그리고 내가 처한 상황, 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상황에 (my nameless situation) 따른 모든 정황에 비추어 보아도 마찬가지지. 그러니 가서 우선 래년이 자네에게 줄 거라고 내게 말했던 그 편지를 읽게. 그리고 그 이상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면 내 고백을 듣도록 하게.

자네의 우정을 누릴 자격이 없는 불행한 친구,
헨리 지킬

민음사 p.110



Unknown impurity.

또, 자신이 만든 약에 우연히 혼입된 불순물의 이름도 알 수 없었다.



그 혼합물을 마셨지만 아무 효과가 없었어. 내가 런던을 얼마나 샅샅이 뒤졌는지는 풀이 말해 줄 걸세. 그래도 아무 소용 없었네. 그러니 내가 처음 구매한 분말에 불순물이 섞여 있었던게 틀림없지. 그 미지의 불순물 (unknown impurity) 때문에 그 약에 효험이 생겼던 것이고.

민음사 p.168



명명하지 못한 그 미지의 영역으로 인해 지킬은 하이드 상태에 어정쩡하게 고착되어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을 하게 된다.


자신이 처한 상황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한 것일까. 끝내 알지 못한 것도 같고, 이해했지만 때가 너무 늦었던 것도 같다. 이름 붙이지 못한 상황과 미지의 불순물은 그대로 남겨지고, 이야기는 끝이 난다.


만약 헨리 지킬이 하이드로 변신할 때 사용한 가루약의 성분 모두가 이름을 알 수 있는 어떤 물질이었다면.

하이드의 이름이 하이드가 아니라 헨리 그 자신이었다면.

이야기는 어떻게 흘러갔을까.


어스시의 마법사에서 주인공 게드가

그림자의 이름을 자신과 똑같은 게드로 명명하고,

위대한 마법사의 길을 시작했던 것처럼.


헨리 지킬도 위대한 의사의 길을

걸어갈 수 있었을까.


그게 마법사가 실재하는 책 속에서 말고,

런던 거리에서 가능한 일일까?


서울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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