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ㅈㅑㅇ Mar 17. 2023

하이드 씨를 잘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지킬앤 하이드> 도서관 책에 낙서하는 하이드 씨


엄지작가 1기 멤버들과 지난달 말쯤 만났다.


지난 한 달간 몇 꼭지 끄적거리고 나눈 뒤라 더 할 얘기가 많았고, 책 이야기로 이렇게나 즐겁게 떠들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좋았다.


2월에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기이한 이야기>와 <고리오 영감>을 읽고 쓰기로 했다. 지난번 수다 때 번역본 마다 뉘앙스 차이가 있다는 점으로도 신나게 떠들었기에, 이번에는 여러 여러 번역본을 빌려서 보고 싶어졌다.


민음사 번역본과 옥스포드 출판사의 영어 원서가 집에 있었고. 도서관에서 세계문학과 펭귄 출판사 번역본을 추가로 빌렸다. 영어 원서에 충실한 것은 전승희 번역의 민음사가 낫네, 강미경 번역의 세계문학 책을 보면서 민음사보다 과하지만 매끄럽네 어쩌네 하면서 보는데. 곳곳에 낙서되어 있는 물음표와 별표, 밑줄 표시에 기분이 언짢아졌다. 책에 몰입하는데 방해가 되는 낙서들이었다.


사실 이 책 뿐 아니다. 도서관에서 꽂혀있는 책 중에 낙서되어있는 책은 수두룩하다. 자신의 느낌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어서 한 것은 아닐 터. 아마 스스로의 편의를 위해 한 낙서일 것이다. 빌려간 사람 이름이 공개된다면 덜 낙서가 줄어들까.


익명의 낙서자들은 과감하다. 인터넷 게시판에 실제 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댓글을 다는 사람들도 과감하다. 자신을 숨긴 이들은 거리낄 것 없이 뻔뻔할 수 있다.

 


하이드(Hyde)의 이름이 '숨다, ~을 숨기다' 라는 뜻을 가진 Hide와 발음이 같은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규칙위반 행위를 과감하게 하는 자. 하이드 씨는 지금 여기, 내가 있는 도서관에,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다. 글쎄. 나도 말은 이렇게 하면서, 조용히 도서관 책에 메롱 이라고 쓰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누가 알겠는가.


엄지작가 1기 멤버들과 이번달 책 얘기를 하며 떠들던 때. 우리끼리 하는 책 수다를 팟캐스트나 유튜브로 하면 언젠가 BTS나 박막례할머니가 될지도 모른다는 우스개소리가 나왔다. 그때 눈물 속 빠지게 웃었으면서도, 한편으론 유명해지지 않고 엄지작가 1인의 익명으로 남았으면 하는 마음이 스쳐 지나갔더랬다. 말도 안 되는 걱정이지만. 이 스쳐가는 걱정은 나에게도 하이드 씨가 있다는 반증 아닐까.


꼭꼭 숨겨둬야 하는 나의 하이드를 부지불식간에 공개하게 될까 봐 내심 두려운 것은 아닌가 싶다.


내 안의 하이드 씨가 분명 있긴 할텐데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진다. 도서관 책에 낙서하는 정도보단 더 할 것 같은데. 그런데 내 안에 숨어있는 뻔뻔한 규칙위반자가 어떤 모습일지 그려보기가 어렵다.


사실 잘 모르겠다. 막연히 두렵기만 하다.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어둠 속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다. 보고 싶지 않은 것도 같다.

 

책 속에서도 하이드씨의 생김새를 구체적으로 제시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이 마지막 과제는 달성하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하이드 씨를 잘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었다. 목격자인 하녀의 주인조차 그를 본 것은 단 두 번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가족은 추적이 되지 않았고, 남긴 사진도 없었다. 모두가 동의하는 점은 단 한 가지뿐이었다. 그 도망자가 그를 본 사람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불구라는 느낌, 그 지울 수 없는 느낌을 남겼다는 사실이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의 기이한 이야기>
민음사 p.59





하이드가 커루 경을 살해한 후 경찰은 수배 전단을 만들어 잡기만 하면 된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의 모습을 설명할 수 없어서 전단 만들기가 어려웠다. 하긴 언제나 어둠 속에 있는 그림자의 모습을 어찌 설명한단 말인가.

 

그림자를

그 형태나마 제대로 보려면,

빛을 등지고 뒤돌아봐야 한다. 가만히.


그림자는 실제로 심리학 용어 중 하나다. 내 안에 있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거나 용납하기 어렵고 역겨운 인간상이라고 한다.


그 그림자가 나에게 인정받지 못하고 계속 배척되면 점점 커져서 반란을 일으킨다고 들었다. 그림자를 가장 잘 알아채고 가져가는 사람은 나의 배우자, 아들 혹은 딸이란다. 전생의 원수가 배우자가 된다거나, 목사와 교수 아들은 망나니라는 말이 융의 심리학에서는 나름 근거 있는 얘기다.

 

하이드에 대한 지킬의 관심은 자식에 대한 아버지의 관심 이상이었네. 지킬에 대한 하이드의 무관심은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무관심 이상이었고.


민음사 p.151 지킬 박사의 마지막 편지 중에서



 

이야기 속 하이드 씨는 모두에게 불쾌감을 줬다. 그러니 지킬 박사만의 그림자라고 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는 혹시 모두의 그림자를 조금씩 투영했던 것 아닐까.

 

나의 그림자는 어떤 모습일까. 어떤 행동을 하고 싶어할까. 섬뜩하고 영 내키지 않지만 가만히 들여다봐야 할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알기 전에 내가 먼저 아는 것이 덜 섬뜩할테니.

 

오늘 밤엔

그림자를 드리울 초가 하나 필요하다.



 

Unsplash CHIRAG K


작가의 이전글 내가 이름 붙일 수 없는 상황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