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 십이월 나흘

가족과 이틀 그리고 친구와 사흘

by ㅈㅑㅇ



충북 제천에서 나흘을 보냈다.


내일이면 출근. 지난 며칠 동안의 짧은 제천 여행을 새긴다. 그런데 새긴다고 할만한 것이 사실 별로 없다. 마음이 흔들리고 움직인 순간은 배론 성지에서의 산책 정도. 대체로 배불리 먹고 편안하게 지낸, 지극히 피상적이고도 현실타협적인 여행이었다. 좋은 것 같은데 좋은 건가? 물음표가 따라붙는다. 새긴다는 말 대신 기록한다로 바꾼다.



1일 차. 예수탄신일. 아침에 일어난 아이들에게 트리 아래 선물을 확인해 보라고 한다. 비록 아이들이 주문한 선물이지만, 휴일 아침에 깨우는데 효과적이다. 첫째는 <화산귀환> 3,4,5권, 둘째는 베이비몬스터 음반이었다. 아이들은 각자의 선물 가운데 몇 가지를 챙겨 차에 올랐다. 아침으로 계란 프라이와 절인 올리브, 모닝빵을 챙겼고 차에서 먹었다. 제천에는 2시간 만에 도착했다.


별 계획이 없어서 처음 어디 갈지 좀 우왕좌왕했다. 어쩌다 박달재를 오르기 시작했다. 디즈니 영화 <카>에서 등장하는 66번 국도 같은 느낌이 드는 길이었다. 과거의 영광을 보여주는 안 쓰는 건물과 오래된 휴게소 안내판이 있었고, 지나다니는 차가 거의 없었다. 박달재 정상(?)에는 박달이와 금봉이라는 애틋한 연인 설화를 주제로 하는 공원이 있었고, 고만고만한 산들 사이로 평야와 마을이 펼쳐지는 풍경을 봤다. 바람이 찼다.


내려오는 길에 목굴암이란 곳이 있었다. 나무를 파서 그 안쪽에 부처를 새겨놓은, 작은 암자처럼 기능하는 나무굴이다. 속인 빈 나무 기둥 안으로 들어가면, 작은 기도 공간이 나온다. 누군가의 노고와 오랜 시간과 사람들이 공들인 부처의 신화가 그 작은 공간 안에 그득하다. 소원 한 가지를 빌어보라고 쓰여있었는데, 소원을 한 가지로 압축하는 게 생각보다 어려웠다. 풍경 소리 잔잔하고도 차가웠다.


차에서 핸드폰 쳐다보는 아이들을 굳이 끌고 나와 한 번 들어가 보라고 했다. 여행은 경험이니까. 한 번 경험해 보라고. 불전함에 넣을 소소한 돈도 쥐어줬다. 아이들의 소원은 무엇이었을까. 하나로 압축이 가능했을까. 목굴암 맞은편 작은 건물에서 스님 한 분이 무언가를 깎고 계셨다. 추위 속에서. 나와 많이 다른 삶처럼 보였으나 어쩌면 그리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신은 없다.







점심으로 숙소 인근 약초밥을 하는 곳에 갔다. 열두 달 밥상이란 곳인데, 솥밥에 나물 반찬 많이 주는 곳이다. 가게 밖 장독대와 주변 산촌 풍경이 좋았다. 약초밥과 곤드레밥을 주문했다. 약초밥은 아이들 표현에 의하면 한약을 부어 지은 밥이란다. 곤드레밥의 곤드레는 초록초록했다. 쌉쌀하거나 아삭아삭한 나물과 배불리 먹었고, 약초밥 맛본 김에 한방 족욕하러 가보기로 한다.


본초다담이란 곳이었다. 제천은 한방 관련 관광상품이 꽤 있는 곳 같다. 함께 일하는 영주 사람이 추천해 준 곳이었는데, 정말 괜찮았다. 낮에도 영하인 추운 날에는 특히 좋았다. 일인당 1만 2000원에 차 한잔 마시며 뜨끈한 물에 발 담그고 쉬었고, 아이들은 각자의 공간을 점유한 채 가져온 무협소설이나 포토카드를 마음껏 본 시간이었다. 남편도 웹툰을 방해받지 않고 봤다.


박달재 휴양림 숙소 체크인을 하고, 본격 저녁 준비를 시작했다. 산이라 해가 더 빨리 지는 느낌. 서둘러 밥을 올리고, 집에서 가져온 닭갈비를 양배추, 양파, 버섯 등과 함께 냄비에서 자작하게 익혔다. 스테이크용 소고기를 익혔고. 들어오는 길에 포장한 떡볶이, 김밥과 함께 차려 먹었다. 깜깜해졌다. 서둘러 정리하고 씻고 카드게임을 한다. 9시쯤 디즈니 플러스를 연결해 지난번에 집에서 보다 만 <아바타 물의 길> 뒤편을 봤다. 전기가 없던 시절의 겨울밤엔 도대체 뭘 했을까 싶어진다.







2일 차. 인스턴트 베트남 쌀국수 라면을 먹고 체크아웃. 점심을 먹으러 봉양면으로 갔다. 봉양에는 인성당 한약방이란 곳이 있다. 제천에 약초가 많이 모인다니 혹시 오래된 한약방 있나 검색했는데, 정말 있었다. 아토피가 있는 둘째 약을 지어볼까 하는 마음 약간 있었고, 제천 ic 인근이기도 해서 아침 겸 점심을 그 동네에서 먹기로 했다. 인성당 한약방은 둘째가 극구 싫다고 하여 말았다.


둘째의 픽으로 황기더덕 막국수를 먹게 되었다. 가게의 내관, 외관, 밑반찬을 보고 맛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기대 이상으로 맛있었다. 메밀면이 아주 훌륭했고, 양도 가격도 놀라웠다. 막국수 9000원. 우리는 곱빼기로 주문했다. 분명 따뜻한 음식이 필요할 것 같아, 엄마인 나는 갈비탕으로 주문했다. 잘 먹었다.







이제 아이들과 남편을 올려 보내고.

햇빛 좋은 카페에서 친구들을 기다린다.


의림다락방이란 곳이었다. 희한한 곳이었다. 인구밀도가 낮은 동네임에도 불구하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오갔다. 한방차 한 잔 마시고 있을 때 친구들이 왔다. 이제는 가족이 아닌 고등학교 친구들과 함께 하는 여행. 결혼 후 처음이던가?


역시나 별 계획이 없는 여행. 일단 숙소 인근으로 향한다. 도로가 이제 친근하다. 어제 문 닫아서 먹지 못했던 떡볶이 맥주집이 생각났다. 이름하여 '그냥떡볶이 제천맥주'. 친구 하나가 대학교 때부터 떡볶이 집에서 맥주를 팔지 않아 불만이었다고 했다. 용우동에서 맥주를 마시려다 제지 당했다나 뭐래나.


맥주집은 만족스러웠다. 좋아하는 영화의 포스터들이 벽면에 붙어있고, 거슬리지 않는 음악이 흘렀으며, 맥주가 부드러웠고, 떡볶이+어묵+튀김은 가성비 최고였다. 어묵탕은 작은 어묵이 10 꼬치 정도 들어있었다. 5000원이란 가격이 믿기지 않았다. 맞은편 김밥킹에서 김밥 한 줄 사 와서 같이 먹고 싶었지만 참았다. 콜라보 메뉴 해주시면 정말 좋을 듯.





숙소는 리솜 리조트. 박달재 휴양림에서 더 산속으로 구불구불 들어가면 나온다. 와. 감탄이 나왔다. 호반건설이라는데, 아파트 이미지와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나무와 숲을 테마로 멋지게 지어둔 곳이었다. 산책로를 걸었고, 저 멀리 첩첩산중 풍경을 감상했으며, 따뜻한 카페 마묵라운지에서 노을이 지는 풍경을 곁눈질하며 소파에 파묻혔다.






3일 차. 느지막이 일어나 아침 산책 후 비싼 조식을 먹으러 갔다. 몬도키친. 이용 시간이 10~12시였으므로 사실상 아침 겸 점심, 브런치였다. 간이 대체로 세지 않았고, 해시 브라운이 바삭했고, 나물이 기가 막혔다. 요거트 고소하고, 오렌지는 딱 먹기 좋게 잘려 있었다.


식사 후 배론 성지를 갔다. 배의 밑바닥을 닮은 땅이라 배론이라 불렸다고 한다. 천주교도인 부모님이 추천했으면 절대 안 갔을 텐데, 친구가 가자고 하니 거부감이 없다. 선뜻 그래 가보자 하는 마음이 들었다. 거 참.


그 땅과 건물과 산세가 편안하고 포근했다. 나뭇가지 앙상한 겨울에도 어쩐지 따뜻하고 양지바른 곳이란 느낌을 주는 곳이랄까. 이곳저곳 기웃거리며 걷고 걸었다. 음악 소리는 조금 줄여줬으면 했다. 음악이 성스러움을 큰소리로 강요하지 않아도 충분히 좋은 곳이니까.


그곳에는 천주교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 묘소가 있고, 최초의 신학교인 요셉학교가 있었고, 황사영 알렉시오가 한국 천주교 박해 사실을 해외 신부님들에게 알리고 도움을 호소하는 편지를 쓰며 지낸 토굴이 있었다.


배론성지 사람들의 이야기는 놀랍다. 자신이 믿는 바를 위해 피떡이 되도록 매를 맞고, 자기에게 맡겨진 임무를 하늘이 내린 거라 여기고 일하다 과로사하거나 순교하는 삶은, 숭고하면서도 거리감이 꽤 많이 느껴진다. 한 무리의 천주교도들이 최양업 신부 묘소 인근의 십자가의 길을 걸으며 기도하고 찬송을 하는데, 사람들 목소리로 듣는 '믿습니다' 변주는 뜨아하면서도 좋았다. 그레고리안 성가처럼.







제천 시내 내토시장 구경을 갔다.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리는데, 배론 성지처럼 걸어지지가 않는다. 몸이 얼었다. 따뜻한 카페에 들어가 몸을 녹이기로 한다. 핫초코와 커피를 주문했고, 테이블 위의 고사리 화분을 보면서 빨강머리 앤을 이야기했다. 앤이 새로 부임한 목사님 환영 식탁을 차릴 때 장식한 풀이 고사리였다고.


친구 하나가 같이 일하던 사람들이 책 이야기 하면 정말 싫어했다고 운을 뗀다. 그럴 수 있지. 먹고 사는 일이 중요하고 층이 다른 피상적 이야기가 중요한 곳에선, 한가한 소리 하고 있네 할 수 있지. 그러거나 말거나 이 자리에선 그냥 말한다.


친구 사이가 새삼스럽다. 별로 거슬리지도 않고, 특별할 것 하나 없고, 잔소리할 일도 없는 사이. 쓴소리가 어려운 직장동료는 물론, 쓴소리가 너무 쉬운 부모자식 관계와는 달라도 참 다르다. 별로 충돌할 일 없는 원자들인가. 나이가 들으니 친구끼리는 더욱 충돌할 일이 적다.


각자의 우주. 그냥 거기. 그렇게.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솥밥에 소주 한 잔 먹고. 숙소에서 둘은 사우나에 가고, 하나는 바닥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사우나에 간 둘은 등을 밀어줬고, 밤에 다 같이 별로 재미없는 영화를 하나 보고 잠이 들었다. 아침 7시 반까지 푹 잤다.


4일 차. 숲을 바라보며 스트레칭하고. 나는 짐 정리 후 라운지에서 여행을 기록한다. 둘은 아침 샤워를 오래 한 후 짐을 옮기고 라운지에 합류했다. 전날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본 한 사람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들었고, 다른 하나는 <작별하지 않는다>를 잡았다. 적당히 떨어진 소파에서 각자의 우주를 유영했고, 시간이 찼다.


함께 차를 타고 귀가했다.


고잉홈.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디세이>가 내년 기대작이란 이야기가 나왔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인터스텔라>도 <인셉션>도 그렇고, 귀가는 중요하다. 제일 먼 친구네 집에 먼저 갔고. 그 동네의 놀라운 3500원짜리 칼국수를 먹은 후, 다시 길에 올라 다른 친구도 집에 갔다. 마지막으로 차 주인이 엄마네 집으로 갔다. 각자의 집에 도착해 가족들과의 일상을 다시 잇는다.




잔소리는 다시 시작되었고.

회사 업무는 내일부터 다시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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