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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ㅑㅇ Dec 10. 2023

연극의 매력

셰익스피어 <햄릿>의 연기, 연기, 연기


오랜만에 연극을 보러 갔다.


소극장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퀴퀴하고 쿰쿰한 냄새가 났다. 환기 안 되는 지하 공간에, 땀 흘리는 사람들. 내게 각인되어 있는 연극의 냄새다. 대학로 어느 소극장에서 오랜만에 그 냄새를 맡았다. 이 날의 극은 디스토피아 이야기로, 스토리 자체는 그저 그랬다. 책이나 영화에서 더 많이, 더 치밀하게 접해온 소재였다. 그러나. 배우들의 기(氣)랄까. 연기자들의 생생한 눈빛과 힘 있는 목소리가 그 모든 엉성함을 압도했다. 연극의 매력은 가까이에서 호흡하는 배우들에게 있음을 느꼈더랬다. 사실 어쩌다 연극을 볼 때마다 느낀다.


소문으로만 무수히 들었던 그 유명한 셰익스피어의 <햄릿>도 연극이었다.


< 연기 演技 >


Play. 지문과 대사로 이뤄진 희곡. 그래서 내게는 접근이 어려웠던 책이다. 아버지를 죽이고 한 달 만에 어머니와 재혼하여 왕이 된 숙부를 둔, 덴마크 왕자 햄릿의 이야기. 과거에는 이 이야기를 책보다는 극으로 접했을 터. 배우들의 생생한 말과 행동으로, 1600년대 사람들 사이에 퍼져나갔을 것이다. 활자화된 것은 훗날 셰익스피어 지인들에 의해서라고 들었다. 그러니까 극이 먼저였고, 책이 나중인 작품이다.


셰익스피어 <햄릿> 문학동네 번역본


이 책을 드디어 읽었다. 소리 내어 읽었다. 줌으로 모인 10명 내외 사람들이 11월 한 달간 매주 월요일마다 한 시간씩 돌아가며 함께 읽었다. 악기는 전시되기보다 소리 내어 연주되는 것이 소명이듯. 희곡은 묵독보다 소리 내어 읽어야 제맛이더라. 순서를 가늠하며 서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경험도 신기했고. 내 목소리가 다른 이들에 닿는 것이 느껴지는 게 놀라웠다. 1시간의 낭독 모임이 끝날 때쯤 내 얼굴은 항상 벌겋게 상기되곤 했다. 희곡 낭독도 연극에 낄 수 있을까.


극 중 햄릿은 연극에 심취해 있었다.


그는 왕궁을 방문한 배우단들에게 직접 베르길리우스 <아이네이스>의 한 장면을 암송하며, 시범을 보였다. 이 시대 고전 몇 페이지 외우고 언제든 시연하는 것쯤은 노래 몇 곡 즐겨 부르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었나 보다. 햄릿뿐 아니라 그가 마음에 두었던 오필리어의 아빠이자, 현왕 클로디어스의 충신인 플로니어스도 스스로 율리우스 시저를 연기한 바 있다며, 햄릿의 억양과 내용이해가 훌륭하다 평가했다. 지금 내 주변에는 없는 신기한 인물들이다.


연극에서 펼치는 재주, '연기'는 가짜를 진짜처럼 꾸미는 능력 아니던가. 그게 대단한 가치를 지닌 일이란 생각은 없었다. 낭독을 하면서 조금 생각을 바꿨다. 낭독에, 연극에, 스스로의 가치를 고양시켜 주는 뭔가가 있다. 내게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는 뭔가가 있는 것 같다. 발표 열심히 하는 아이들도 이런 기분인가. 연극배우들의 기운이 유난히 시퍼렇게 생생한 것도 비슷한 맥락인가.



참 놀라운 일 아닌가, 여기 이 배우가 오직 허구 속에서, 상상의 격정 속에서 자신의 영혼을 자신의 상상과 일치시킬 수 있고, 거기에 감동해 그 얼굴이 온통 창백해지고, 눈 속의 눈물, 낯빛에 나타난 넋 나간 표정, 갈라진 목소리와 자신의 온 신체 기능이 적절한 표현으로 자신의 상상에 부합되게 하다니, 그것도 무대가로!

p.92 <햄릿> 문학동네, 햄릿이 배우들에게 감탄하며 하는 말



햄릿은 연극에서 복수의 실마리를 찾았다. 우선 미친 척 연기하기 시작했다. 아까의 그 배우들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햄릿을 달래기 위해 왕궁에 초대받은 이들이다.


그의 작전은 이러했다. 유령이 알려준 살인 장면을 연극으로 짜서 숙부 클로디어스가 보는 무대에 올린다. 낮잠 자는 선왕의 귀에 독약을 붓는 장면을 보며 클로디어스가 움찔하면 유령 말대로 그가 범인이므로(물증은 없고 심증뿐이긴 하지만), 복수를 결행키로 했다. 과연 그 연극을 보며 클로디어스는 심하게 괴로워하며 극을 중단시키고 혼자 방으로 돌아갔다. 햄릿은 칼을 들고 뒤쫓아가지만.


< 연기 延期 >


Delay. 그는 결행하지 못했다. 혼자 기도하는 클로디어스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이 기회'인 줄 알았으나 발뺌한다. 적이 참회하고 천국에 가게 할 수 없다며 칼을 칼집에 넣었다. 20대 후반에서 30살 정도의 햄릿이 클로디어스를 힘으로 제압할 수 있었을 텐데도 말이다.


그는 왕을 죽이기 싫었음에 분명하다. 아버지 유령이 죽이라고는 했지만,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할지 걱정이 앞서지 않았을까. 어쩌면 스스로 왕좌에 올라야 할지도 모른다. 왕은 그의 성정에 맞지 않는 직업이었다. 이 시대 직업은 선택이라기보다 운명이긴 했지만, 햄릿은 참 요즘 사람 같은 구석이 있다. 아빠 내 할 일은 알아서 찾을게요.


햄릿은 왕처럼 나서서 행동하고 집행하기보다, 물러서서 생각한다. 이웃나라 왕자가 오로지 명예를 위해 계란껍데기만 한 폴란드 땅을 차지하러 나설 때, 그는 20만 병졸의 죽음에 몸서리쳤다. 좋은 말로 사유하는 인간이나,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결정적 순간을 모면한다. 변명이 산을 이룬다.




To be or not to be,
that is the question.




하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

되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구나.

결행하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구나.

왕이 되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라네.

연극인으로 사느냐 마느냐, 그것이 문제인가.

이대로 살아가느냐 뒤엎느냐, 그렇게 늙어가네.


21세기를 사는 나도 생각만 많다. 결정과 행동은 자꾸 연기한다.


당장 나가서 부딪혀봐야 할 때에도. '정말 그럴 가치가 있을까?' 하며 아몰랑 발을 빼기도 한다. 행동은 최대한 다음으로 지연시킨다. 당장 그거 안 한다고 죽는 거 아니거든. 진짜 문제 맞나. 다시 원점에서 재검토. 시간이 흘러 그 문제가 더 이상 문제가 아니게 될 때까지 미적거리기.


이리하여 내적 반성은 우리 모두를 겁쟁이로 만들며,
이리하여 결심의 본색은
우울이라는 창백한 색으로 덮여서
지고의 중요한 거사들은
이로 인해 노선이 바뀌고,
실행의 이름조차 잃게 된다.

p. 101 <햄릿> 문학동네, 햄릿의 독백



< 연기 緣起 >


Thereby. 어떤 문제는 인연이다. 대면을 지연시켜도 끝까지 나를 찾아낸다.


햄릿의 칼부림은 뒤늦게 어설프게 실행됐다. 커튼 뒤의 플로니어스를 클로디어스라 생각하고 죽였다. 플로니어스는 오필리어의 아빠이자 클로디어스의 충신. 번지수를 잘못 찾은 복수는 문제의 덩치를 더 키웠다. 그리고 그를 오필리어의 무덤 앞으로 인도했다. 일은 더 커져 햄릿 자신은 물론, 숙부, 왕비, 오필리어의 오빠이자 국민들의 신뢰를 얻던 레어티즈까지 전부 한꺼번에 죽어 쓰러지고 나서야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마지막에 빈 덴마크 왕좌에 앉는 것은 노르웨이 왕자. 일전에 햄릿 아버지에게 죽임을 당한 왕의 아들, 포틴브래스이다. 오필리어의 무덤을 파던 일꾼이 한 말이 비로소 와닿는다 : 노르웨이 왕이 죽던 날, 햄릿이 태어났다. 그러니까 이야기는 햄릿 아빠가 포틴브래스 아빠를 죽이고 그의 것을 취하면서 시작됐던 것. 선왕의 업보를 햄릿을 비롯한 사람들이 죄다 죽음으로서 갚은 것이다.


이야기는 큰 그림으로 보면 아버지 업보의 그물이다. 햄릿이 원해서 맺은 인연이나 상황은 아니다. 그는 그냥 거기 던져졌다. 내가 연극을 보는지, 연극을 하는 건지. 꿈이 나를 꾸는지, 내가 꿈을 꾸는 건지.






연극의 매력은 이야기의 서사보다 다른데 있다는 사실을 떠올려 본다. 배우 한 사람 한 사람의 생생한 눈빛과 힘 있는 목소리. 관객 가까이에서 호흡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행동에 연극 최고의 매력이 있다. 어쩌다가 보는 연극이지만, 볼 때마다 느끼는 바이다.


햄릿의 생이 아빠 업보의 그물이란 것을 알았다한들 그가 할 일은 같다. 최대한 팔딱이며 생명을 증명하는 것. 그물에서 달리 무엇을 한다 말인가.


오늘도 최대한 팔딱여보자고 마음먹는다. 노년이 몰래 걸어와서 나를 땅속에 내동댕이 치기 전에.


즐거운 가운데 시간은 쉬이 지나갔지만.
아, 세상만사 속절없다고 생각했도다.
그러나 노년이 몰래 걸어와서
억센 손아귀에 나를 움켜잡고
나를 땅속에 내동댕이쳤으니
내 신세 온데간데없도다.

p. <햄릿> 문학동네, 무덤지기의 노래 중에서


unsplash : d-a-v-i-d-s-o-n-l-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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