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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ㅑㅇ Apr 20. 2024

사람을 기대함

걸리버 여행기 읽는 도중 나도 여행기


저는 지금 미국에 와 있어요. 업무차 일주일 정도 일정으로 혼자 왔고 여행 코스는 없습니다만. 그래도 여행기라고 쓸래요. <걸리버 여행기> 읽으면서 쓰는 <나도 여행기>입니다.


저도 걸리버처럼 돈 때문에 출발했습니다.


걸리버가 소인국, 릴리펏으로 가게 된 이유는 생활고였습니다. 걸리버가 릴리펏이란 목적지를 계획했던 건 아니었지만. 분명 말라붙은 돈줄을 어떻게든 해결하고자 선상 의사 자리를 지원하며 항해를 떠났죠. 두 번째부터는 돈 보다 떠나고 싶은 마음이 컸어요. 여행의 매력에 빠진 거죠. 아내는 반대했지만 걸리버는 돈을 명분으로 세웁니다. 더 벌어두면 자식들에게 좋을 거라는 게 이유였고, 아내도 거부하지 못합니다.


제가 여기 온 이유도 표면적으로는 돈입니다. 하지만 돈 만으로 마음이 움직이진 않잖아요. 좀 복합적이라고 할까요. 제 밥줄인 회사에서 꼭 필요한 일이기도 했고. 동시에 이렇게 다녀가면 내 안에 뭔가 남을 거란 것을 알기에 기꺼이 지원했습니다. 새로운 경험을 은근히 기대하면서요.


그러다 풍랑을 만났지요.


애틀랜타 공항에 도착한 후 비행기에서 내리질 못했습니다. 비행기와 탑승통로를 연결하는 게이트에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사다리를 가져온다 했다가, 게이트를 옮긴다고 했다가, 또 다른 게이트로 이동하기 위해 관제탑 교신을 기다리다, 파일럿이 아예 "나도 이제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Now I honestly don't know what's going on"이라고 방송을 하더군요. 나참. 그렇게 2시간 있었어요.


설상가상 입국심사줄도 길고, 겨우 통과한 후 바로 다시 보안검색대를 지나가야 하는데 실수로 출국장으로 나갔지 뭡니까. 공항직원들이 다시 들어갈 수 없다고 난리예요 다시 티켓 스캔하고 보안검색대 통과해서 들어오래요. 이래저래 결국 다음날 아침 7시 반 비행기를 기다려야 했습니다. 공항에서 노숙했죠.


(다음날 아침 7시 공항에 지하철 타듯이 몰려드는 출근족들을 보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대륙의 스케일은 출퇴근을 비행기로 하나 싶었지요. 나중에 듣기로, 평일 아침이면 많은 세일즈맨들이 영업하러 다른 도시로 갈 때라네요)


걸리버는 상황이 훨씬 안 좋았어요. 첫 항해에서는 풍랑을 만나 배가 완파되고 본인만 겨우 살아남아 릴리펏 해안에 당도합니다. 두 번째 항해에서는 새로운 땅에서 물 찾다가 샛길로 샜지요. 다들 거인을 보고 도망가고 걸리버만 남겨져요. 세 번째 항해에서는 해적들을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남는 와중에 세치 혀 잠시 잘못 놀려서 앙갚음을 당해 외딴곳에 버려집니다. (마지막 네 번째 이야기는 다음 주에 볼 거예요. 또 어려움을 당하겠죠. 어려움은 새로움으로 가는 열쇠인가 봅니다)


이번에 간 미국은 저에게 걸리버의 두 번째 여행지인 거인국, 브롭딩낵 같았어요. 어쩐지 그 땅에서만은 한 없이 작아지고, 나의 생존을 최우선순위에 두어야 할 것 만 같은 느낌?!


도착해서 보니 정말 땅이 넓어서 그런가 건물을 널찍하게들 지어놨어요. 집도 단층, 고층 건물이 별로 안 보여요. (출장지가 지방 소도시였어요) 고속도로 중앙분리대는 쩨쩨하게 분리대 하나 놓고 불안하게 다니지 않아요. 도로 너비의 풀밭을 한가운데 배치해서 맞은편 차선에 전혀 위협이 안되고요. 지나가는 트럭은 우리나라 트럭의 두 배. 어쩌다 마주친 기차는 끝이 안보입디다.


호텔 샤워기는 저 하늘 위에 달려있고. 세면대는 십이지장 높이에 위치해 있어서, 세수하려면 까치발을 들어야 하네요. 그나마도 소매가 흠뻑 젖어야 세수가 끝납니다.


지방 소도시 고속도로 풍경. 그리고 내겐 너무 높았던 세면대.



키 작은 동양 여자는 나이보다 훨씬 어려 보이는 경향이 있지요. 그 말 이번에도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아이가 둘 있음을 밝히면 다들 놀라요. 걸리버가 말했어요, 작으면 피부가 더 좋아 보인다고. 릴리펏 작은 사람들은 피부가 매우 좋아 보였고, 브롭딩낵 거인들은 너무 잡티가 잘 보였다고요.


음식도 너무 컸어요. 피곤하고 시차 적응도 안 돼서 위장이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는데, 1인분은 왜 이렇게 큰 건지 음식을 자꾸 남기게 됩니다. 음식 해준 사람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같이 먹는 사람에게 면이 안서기도 했어요. 그냥 혼자 크래커랑 치즈 사 먹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르겠어요. 제 몸에도, 환경에도.


잠도 좀 연이어 잤으면 좋겠어요. 1-2시간 쪽잠 모아 저축하듯 잤어요. 본래 잠 부족하면 머리가 아팠는데, 잠 못 자서 심장이 쪼그라드는 느낌은 이번에 처음 받아본 듯합니다. 나이가 든 건지 체력이 떨어진 건지..


2~3인분 같은 1인분. 팬케이크 혼자 아침에 4-5장 먹는거였나요? 소고기 쌀국수엔 양이랑 도가니도 들어있었습니다. 아메리칸 스케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풍랑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여행은 기분을 좋게 하는 뭔가가 있어요.

마음속 전환 스위치가 켜지는 기분이랄까요.



그게 뭘까요? 돈? 어디서 돈줄이 꼬였는지 알아보고 앞으로의 가능성을 타진해 보긴 했지만. 그건 두고 볼일이고, 실상은 오히려 돈을 쓰고 가지요. 낯선 풍경? 새롭고 신선하긴 합니다만. 굳이 이걸 보러 이렇게 힘들게 움직이진 않는 것 같아요. 우유니 사막이나 오로라 볼 정도 아닌 이상 말이죠.


오늘 일정을 마무리하면서 곰곰 생각해 보니,

여행 중 마음이 차오르는 순간은

결국 사람에 있네요.


내일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공항으로 이동하는 Lyft(우버, 카카오택시 같은 앱 기반 이동수단)에서 만난 24살의 Deysi랑 몇 마디 주고받을 때 참 재미있었습니다. 엘살바도르에서 태어났고, 캘리포니아와 워싱턴, 조지아에서도 일했다는 그녀. 정장 입은 제 모습과 아이 있고 직업 있는 점을 높게 평가하는 것 같았어요. 제가 외국어 몇 개 더 할 것 같다네요 헐. 제 영어가 부족해서 '뭐라고?' 했던 것을 본인 영어가 부족해서 못 알아듣는 줄 알아요. 그녀에게 자신감을 보태주고 싶었습니다. '너 아직 굉장히 젊잖아. 엄청난 자산이야 그거.' 그녀가 웃으니 저도 좋았습니다.


이메일로만 수개월 만나왔던 새로운 업체의 A. 업무 미팅 이후 이동하는 자리에서 말해요. 역사를 좋아한다고. 미국이 베트남 보다 실패한 전쟁이 한국 전쟁이라며, 너무 많은 사람들이 단기간에 죽었다고 했습니다. 저에게는 새로운 시각이었어요. 한국전쟁은 미국이 성공한 전쟁인 줄 알았어요. 트럼프에 대한 반감이 확실하던데. 미국 업체 가운데 이렇게 분명하게 반 트럼프를 밝히는 사람은 처음 봤습니다. 대부분 은근히 친 트럼프거든요. 야 참 신기하다 싶었습니다.


사장님의 오랜 친구인 K. 사장님이 왜 그렇게 좋아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습니다. 꿈꿀 수 있는 사람이더라고요. 숫자나 디테일로 들어가면 좀 허당인데, 현재 행하고 있는 사업의 청사진을 촤라락 펼치더라고요. 아주 안 좋은 조건에서도 말이죠.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출장하는 사람의 노고를 잘 알아서 일정 중 호텔 방에 들어가 쉬는 시간도 안배할 수 있는 사람이었어요. 숫자나 디테일을 좀 도와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Lyft에서 만났던 Andres가 귀가 잘 들리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도 기억에 남습니다. 리프트 앱에서 연결 후 알림이 떴어요. 그가 인사에 바로 답할 수 없을 수 있다고. 그의 터프한 운전도 인상적이지만, 어쨌든 웃음으로 인사하던 얼굴이 기억에 남아요. 이렇게 일할 수 있구나 싶기도 했고요.


또 '이렇게 멀리 가는 줄 몰랐다'며 정말 미안한데 리프트 취소해 달라고 연신 사죄하던 그 SUV 청년 Tonny도 재미있었어요. 정말 괜찮았는데 굉장히 온몸으로 미안해해서 말이죠.


호텔 아침식당에서 만난 친절한 웨이터 아저씨도 기억납니다. 거의 매일 이동하느라 매번 다른 호텔에 체크인했는데 세 번째 호텔이었을 거에요. 정말, 그날 아침 식사부터 입맛이 돌기 시작했거든요. 가식적인 미소 없이 진짜로 친절하게 대해주고, 자세히 설명해 주셨어요. 덕분에 계란 프라이랑 오렌지 챙겨 먹었습니다.


그 누구보다 가장 기억에 남는 이는, 공항에서 비행기 환승에 문제가 생겨서 11시간 대기해야 할 때 그나마 오래 머물기 편한 곳으로 직접 안내해 준 그녀입니다. 한 밤의 공항 투어. 정말 잊을 수 없죠.





걸리버도 여행에서 이런저런 사람들을 만납니다.


릴리펏에서는 자신이 탄핵될 거라는 것을 알려준 이가 있었고, 브롭딩낵에서는 말을 가르쳐주고 보호자를 자처한 글룸달클리치가, 라퓨타 이야기에서는 어느 일본인 선장과 무노디 경의 호의를 받지요.


책은 인연보다는 그들을 통해 만나는 새로운 세계, 거기서 반추하는 현실 세계에 주목합니다. 이 책의 웃음포인트이자 매력이지요. 1726년이나 2024년이나 정치판은 어찌나 그리 닮았는지 몰라요. 인간이 이룬 고귀함, 과학, 정치, 법치, 명예 등을 아주 신랄하게 풍자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쓴웃음을 참 많이 짓게 되는데, 계속 읽으면서 힘이 좀 빠지기도 해요. 


반대 정당 지도자들의 머리를 반씩 잘라 합치면 양쪽 뇌가 서로 대화해서 중용을 찾을거라는 아이디어. 거인국 브롭딩낵 왕의 질문과 촌평..



신랄한 풍자보다 여행에서 맺은 인연과 걸리버의 마음이 더 부각 됐었다면. 책이 훨씬 더 잘 읽혔을까요? 고전이 되지 못하고, 그냥 그렇고 그런 소설로 묻혀버렸을까요?


여행을 다시 들여다봅니다.


시작은 돈이었다지만

사실은 사람을 찾던 것도 같습니다.

걸리버도 저도요. 인연을 찾는다고 해야 할까요.

가치를 찾는다고 해야 할까요.


(그러고 보니 걸리버가 4부에 이르면 유토피아에 가까운 '후이늠'을 만납니다) 


여행에서 만난 사람들을 되짚어 보니. 관광지 아무 데도 가지 않아도 뿌듯한 여행을 한 기분이 듭니다. 사실 고민했어요. 비행기 타기 전까지 남은 짧은 일정에 유명 관광지 한 군데 다녀올까, 호텔방에서 음악 들으면서 만난 사람들 끄적일까 하고.


인연을 소중히 하고, 가능하다면 이어가는 게

더 가치 있어 보이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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