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리버 여행기> 후이늠에게 인간이란
걸리버의 마지막 여행지는 후이늠의 나라입니다.
후이늠은 말입니다. 그냥 말이 아니고, 생각하고, 말하고, 가진 것을 나눌 수 있고, 무릎과 발굽을 써서 바늘에 실도 꿸 수 있는 말입니다. 후이늠~이란 단어도 어쩐지 말 울음소리랑 비슷한 것 같아요. 히히힝~후이늠~푸~~~
걸리버가 전하는 후이늠들은 고귀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우정과 박애를 추구하며 먼 곳에서 온 후이늠을 차별하지 않고, 정중하며 품위 있지만 격식을 따지지 않습니다. 자식을 맹목적으로 사랑하지 않으며 전적으로 이성이 지시하는 바에 따라 행동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성은 이것저것 따질 필요 없이 거의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옳은 것이었습니다. 이를테면 양심 같은 것이요.
그들 사이에서 이성은 우리처럼 어떤 문제의 양쪽에서 타당성 여부를 따지는 문제적 인식이 아니라, 즉각 확신이 들 정도로 알고 또 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감정이나 이해관계로 뒤범벅되고, 그로 인해 깨달음이 모호해지거나 퇴색되지 않는 확고한 이성이었다.
P.327 <걸리버 여행기> 조너선 스위프트, 현대지성
올 초에 읽었던 소크라테스의 <변론>이 떠오르는 구절이었습니다. 사람이 아주 고귀해질 수 있는 지향점을 보던 고대 철학자, 엄밀히 얘기해서 플라톤이 전해주던 소크라테스였죠. <변론>에서 보이는 소크라테스는 정말이지 재물에 욕심이 없고, 주변 사람과의 관계보다는 미덕에만 온 관심을 기울입니다. 사람은 응당 그런 경지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더군요. 후이늠은 그 고귀한 경지에 이미 도달해 있는 존재들이었습니다. https://brunch.co.kr/@7bef61f7eaa2497/74
걸리버에 따르면 후이늠들은 절제, 근면, 운동, 청결에 대해 교육을 받으며. 교육에 있어 남녀를 가리지 않습니다. 죽음에 대해서도 매우 수용적이고, 상실에 대해 함께 대처합니다. 자녀를 잃은 후이늠이 있다면 다른 가족이 대신 낳아주기도 합니다. 운동 경기를 가끔 하는데 승자는 상으로 그 혹은 그녀를 칭찬하는 노래를 받습니다. 물질적인 것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는 곳이지요.
걸리버는 후이늠의 나라에서 흡족하게 검소한 생활을 합니다. "육체적으로 더할 나위 없이 건강했고 정신도 평온했다(p.338)"고 말합니다.
그곳에는 친구의 배신이나 변덕, 질투가 없습니다. 또 조롱하는 자, 비난하는 자, 험담하는 자, 소매치기, 노상강도, 변호사, 포주, 어릿광대, 노름꾼, 정치인, 재주꾼, 지루한 연설가, 강간범, 살인자, 거장인체 하는 사람, 파당과 파벌의 지도자나 추종자도, 악덕을 권장하는 자도 없었습니다. 당연히 전쟁도 없었겠지요.
후이늠의 대척점에 야후가 있습니다.
야후는 사람과 비슷합니다. 언제부터 후이늠의 나라에 나타났는지 모르겠지만, 외래종으로 여겨집니다. 그들의 됨됨이는 '야후~~~'하고 소리치는 모양새를 생각하면 됩니다. 그곳 어느 동물과도 구분되는 혐오스러운 특징이 있다네요.
고귀한 후이늠과 대조적으로, 감정이 널뛰고, 욕심 많고, 속고 속이며, 싸우고, 과식하고, 건강에 안 좋고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에 목매는 존재들입니다. 반짝이는 돌에 환장합니다. 요즘으로 치면 옷이나 자동차, 가방으로 바꿀 수 있을까요? 치장하고, 서로 속고 속이며, 때로 잔인해집니다.
그리고 거짓말을 합니다.
후이늠에게는 거짓이란 개념 자체가 없어서 '있지도 않은 것'이라 지칭하는 수밖에 없었다네요. 물론 다른 동식물도 거짓말을 하긴 합니다. 보호색을 두르거나 변장을 해서 다른 종을 속이지요. 인간은, 그러니까 야후는, 같은 야후를, 속이기 위해서 거짓말을 합니다. 반짝이는 돌을 차지하기 위해, 숨기기 위해, 욕심 때문에요.
최근 화제를 모았던 넷플릭스 드라마 삼체. 거기 나오는 외계 문명에도 거짓말이 없대요. 의사소통을 생각을 공유함으로써 하기에 거짓이란 개념 자체가 없습니다. 직접 본 것은 아니고 친구한테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 친구가 삼체에서 소름 끼치던 장면을 얘기해 줬어요 ;
삼체인들이 사는 곳은 태양이 3개라 기후를 예측하기 힘들고 극한 환경에 놓여 있습니다.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지구인과 통신하게 되고, 지구로 옵니다. 오는데 시간이 많이 걸린대요, 400년이었나?
지구인과의 통신 중 전래동화인지 소설인지 '지어낸 이야기'를 들려줬을 때, 삼체인이 질문합니다. 당신도 거짓말을 하나? 뭐 가끔 하지. 그리고 그때까지 활발하던 교신이 뚝 끊깁니다.
사기는 거짓말로 지은 성.
스팸전화는 뻔한 거짓말.
피싱은 교묘한 거짓말.
정치는 눈에 보이는 거짓말.
광고 마케팅은 화려한 거짓말.
영화도 드라마도 따지고 보면 가짜 이야기.
인간 세상은 정말 거짓말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실을 소재로 한 요리가 한가득 차려져 있죠.
야후의 특성 중 과식한다는 얘기가 있었는데.
여러모로 인간은 과식을 즐기긴 합니다.
필연적으로 쓰레기도 많이 만들고요..
하지만. 삼체인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해서 후이늠처럼 고귀한 존재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후이늠이 고귀하긴 하지만 제가 그들과 함께 즐거울지는 확신이 안 섭니다. 거짓말이 세상을 피폐하게 하긴 합니다만. 은유와 시, 이야기가 한편으론 세상을 풍요롭게 하지 않던가요.
아무래도 제가 명백한 야후이다보니, 거짓말에 대해 변명을 늘어놓고 싶어지나 봅니다. 따지고 보면 <걸리버 여행기>라는 책도 거짓말입니다. 전래동화, 소설, 영화 없이 살 수 있을까요. 재미와 풍요를 알아버린 저는 거짓말과 과식을 버리기 어렵네요. 거짓 상상 속에 사실은 별로 없어도, 진실이 있는 경우는 있잖아요. <걸리버 여행기>가 17세기 후반 18세기 초반의 사회상을 담고 있는 것처럼요.
과식은 제쳐두고, 거짓말을 자세히 봅니다.
책에서 건드리는 여러 가지 인간 속성 가운데 깊숙한 곳에 있는 것이 욕심,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거짓말 같아요. 걸리버 Gulliver라는 이름이 '잘 속는'이란 뜻의 Gullible과 비슷하게 들리는 것은 의도된 설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후이늠을 가리키는 '말(horse)'과 사람의 언어 '말(language)'이 같은 소리를 낸다는 것은 우연일 테지만. 한국어로 읽으니 더 기가 막힌 설정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야후이면서 후이늠이기도 한 존재라고, 저 편한 쪽으로 생각해 봅니다.
걸리버의 유토피아였던 후이늠의 나라. 그곳에 거짓이 없다지만. 그거 아셨나요? 유토피아는 Utopia '이상향'을 뜻하긴 하지만, 고대 그리스어 직역으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곳'을 뜻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유토피아도 거짓말, '있지도 않은 것'을 통해 구체화되는 개념인 거죠.
책 모임은 이제 마무리됩니다. 내일 줌 미팅을 마지막으로 <걸리버 여행기>는 당분간 덮어둘 예정입니다. 미팅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아직 마음이 서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적어가면서 생각을 정리하는 중인데요.
함께 읽은 것들 중 소인국의 계란 까는 법, 거인국에서의 몸집 차이가 자존감에 미치는 영향, 라퓨타와 발니바비의 사변적인 사람들 그리고 인근 럭낵의 죽지 않는 사람인 스트럴드브럭 이야기, 후이늠의 나라 유토피아를 통해 보는 나의 유토피아, 책 전체에 흐르는 앞뒤 안 맞는 시간과 거짓말, 이런 이야기 가닥들이 잡힙니다.
너무 무겁지 않게, 즐겁게 마무리하면서, 이야기를 돌아보고 각자의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묘약... 무엇일까요. 오늘 밤은 쓰고 난 후에도 고민이 계속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