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피해자와 가해자로서 역할을 하는 경험은 흔하지 않지만, 일단 법적인 문제로 휘말리게 되는 일은 번거롭고 복잡하여 피하고 싶기 마련이다. 이사를 온 집에서 자전거 도둑을 2번 경험하고 나니 처음에는 덜덜 떨렸던 신고 조서가 두 번째 쓰게 되면서 담담해졌다. 처음에는 분노와 억울한 마음에 화가 났었는데, ‘한 번 쓴 조서는 되돌릴 수 없다’는 경찰관의 말에 ‘내가 그 학생의 앞길을 막는 건 아닌지’ 걱정에 괜히 신고 했나 겁이 났다. 나중에 알고 보니 동네 아이여서 엄마와 아이가 같이 찾아와 사과 인사를 했다. 그때 나는 자전거 잃어버린 마음보다 그 엄마의 마음이 상할까 괜찮다고 너무 혼내지 말라고 아이들이 그럴 때가 있다고 하며 돌려보냈던 기억이 있다. 작은 사건이라 그렇지만 법적으로 접근하면 용서가 안되고 어색했던 일이 사람을 마주하고 보니 쉽게 용서할 수 있는 일이였다.
그러나 뉴스에 나오는 흉악범의 사건들을 보면 피해자 입장에서 볼 때 법적인 형량이 너무 작다는 생각이 들고 용서가 힘든 경우가 많다. 그래서 재판이 끝나면 판사가 욕을 먹기도 하고, 사람에 대한 신뢰가 많이 깨지게 된다. 사람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에너지와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우리는 쉽게 포기하게 된다. 하지만 ‘법정이 도축장’이라고 비유하는 저자인 박주형 판사는 여러 범죄자의 형량을 최종 통보하는 양형의 이유를 써 내려가면서 냉정하게만 보이는 일을 참으로 따뜻하게 그려낸다.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고 다양하고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범죄자들을 만나면서도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사랑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특히나 소년범죄에 대한 글을 보면 같은 죄를 반복하게 되는 것 또한 그 아이들만의 잘못이 아니라 존재로서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한 환경 때문이라고 강조한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모든 사람의 불행이라 여기는 아이들..아이들을 사회적으로 완전하게 출생시키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고, 이 아이들이 완전히 태어나게 하는 데 필요한 것은 꾸준한 관심과 지지였다. 원래부터 순진무구한 새끼고양이는 늘 적대적이고 거칠기만 한 이 세상에서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강한 척, 사악한 척 위악을 떤 것일 뿐임을, 비행과 하악질은 자신을 구해 달라는 아이들과 새끼고양이의 간절한 절규였음을 이제는 알고 있다.
그래서 낯설고 무서워보이고 어려운 법정에서 저자와 같은 판사가 있다는게 감사하고 희망적으로 보였다. 특히 정의에 대한 글을 보면 생각의 깊이가 얼마나 남다른지 알 수 있다.
논변이 화려하고 유창하다면 의심스럽다. 법정에서 오랜기간 지켜본 정의는 대체로 어눌했다. 진실과 정의는 유려한 언변으로 치장되지 않더라도 발광한다. 적당한 분노와 적의는 정의다. 정의에는 적기가 있다. 정의의 민낯을 보려면 기다림이 필요할 때도 있다. 정의는 의심할 수 있지만 정의에 대한 열망을 품은 인간 그 자체는 의심할 수 없다.
이처럼 우리는 겉으로 보여지는 것에 다수의 시선에 어눌해서 기다리지 못해 혹은 돈이 없어 억울하게 진실이 가려지고 무시당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누구를 보호하려고 만들어진 법인지 모를 정도로 인간 주체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고, 법의 존재가 형식에 치우치게 될수록 판결은 더욱 불완전해질 것 같다.
더욱 많은 법과 무거워진 형량에도 무서운 범죄들이 더욱 극성을 부리는 것을 보면 죄는 꼭 벌한다고 없어지는 건 아닌 것 같다. 세상이 무서워졌다고 믿을 사람이 없다며 나의 안전만 외치는 사회에서 외치는 사회에서 ‘너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한 번 더 고민해주고 믿어주는 사람 하나가 그리운 것은 법이 사람을 위해 만든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주형판사의 생각처럼 법이 판결과 재판이라는 비정한 형식을 빌리고 있지만, 서정을 잃지 않아야 하고, 모든 경계와 언어, 피부색, 인종 모든 것을 넘어서는 ‘사랑’에 기반하고 부역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우리가 기계인 AI에게 판결을 맡기지 않는 이유라고 자신있게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