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하의 [작별인사]를 읽고
한 번 아파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안다. 그 고통이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그래서 웬만하면 같은 아픔을 겪지 않기 위해 여러 가지로 애를 쓴다. 개개인의 아픔은 다 다르며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함부로 대하거나 공감해 주지 못하면 더 아플 수도 있다.
그런데 아픔을 선택하는 사람이 있을까? 김영하 작가의 주인공 철이는 우리가 피하고 싶은 아픔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고통을 참고, 힘듦을 견디면서 죽음을 맞이한다. 자신이 정교한 프로그램으로 짜여진 인공지능 휴머노이드 로봇임을 알았는데도 인간처럼 느끼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인간들은 의미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아까 고통의 의미라고 하셨지요? 고통에 과연 의미가 있을까요? 인간들은 늘 고통에 의미가 있다고 말합니다. 아니, 더 나아가 고통이 없이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말하지요. 과연 그럴까요?”라는 선이와 달마의 대화를 읽으며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몸이 아파서 걱정이 쌓이자 마음마저 아팠던 경험이 있다. 몇 년 전 갑작스럽게 몸이 안 좋아 고혈압이라는 진단을 받았지만 약을 먹지 않고 2년 정도 고강도 운동과 체중조절, 식이요법 등을 통해 조절해 보려고 나름의 노력을 했다. 그러던 중 가슴 통증, 호흡곤란, 소화불량 등으로 원인 모를 통증에 시달리다 20년 전에 심근경색으로 갑자기 돌아가신 엄마가 떠올랐다. 나도 모르게 불안감이 쌓였는지 공황장애 같은 숨을 쉴 수 없는 괴로움과 불면증으로 몸은 점점 아파졌다. 한번 몸에 새겨진 불안감은 벗어나려 할수록 더 크게 나를 힘들게 했고 똑같은 통증이 올까 두려움에 밤마다 떨었다.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다는 두려움이 생겼다. 남편은 ‘왜 그런 생각 하느냐고, 자기는 지금 죽는다고 해도 그렇게 아쉬울 것도 없을 것 같은데….’한 마디로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약이 있고 그렇게 큰 병이 아닌데 심각하게 생각할 게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때는 이성적인 생각이나 조언이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 마음이라 마음이 뭘 말하는지를 저는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마음은 기억일까요? 어떤 데이터 뭉치일까요? 또는 외부자극에 대응하는 감정의 집합일까요? 아니면 인간의 뇌나 그것을 닮은 연산 장치들이 만들어내는 어떤 어지러운 환상들일까요?”
나의 마음은 어디 있는 것이길래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할까? 원인을 찾고 싶었고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습관처럼 책도 찾아보고, 운동에 집중하는 등 노력을 해 보았다. 돌아보면 초기에는‘왜 나에게 힘든 고통이 찾아 왔을까?’ 원망 속에 여유도 없고, 한숨만 쉬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몸이 아팠던 것 같은데 왜 마음까지 힘들었을까? 마음은 몸과 무슨 관계가 있을까? 주인공 철이는 몸은 없고 머리만 남게 되었을 때 감정을 느끼기 힘들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어느 것이 먼저라 할 수 없이 몸과 마음은 연결되어 몸이 피곤하면 마음이 힘들기도 하지만, 마음이 힘들 때 몸을 열심히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아무 생각이 없어지기도 한다. 나도 몸이 아프고 마음이 아파 보니 두 가지가 연결되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건강을 위해 무리하게 했던 운동으로 몸의 아픔을 억압하게 되어 마음이 아파지게 되고, 마음이 아파지니 다시 몸이 아파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몸을 돌봐주고 잘 살펴주는 것이 곧 마음을 편하게 할 수도 있으며, 마음을 긍정적으로 채워야 몸도 건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최근에 읽은 [내가 틀릴 수도 있습니다]에서 ‘인간이 겪는 심리적 고통 대부분은 자발적인 것이며 스스로 초래한 고통입니다.’라는 저자의 말처럼 모든 일이 일어난 이유가 있었다. 아픔도 즐거움도 내가 만들 것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나를 돌아보니 조금씩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라는 말을 되새기며 ‘오늘보다는 반드시 내일 더 좋아질 거야,’라고 다짐하고 생각을 바꾸니 언제 그랬나 싶을 정도로 편안해지게 되었다. 시간을 갖고 긍정적인 마음이 쌓이니 몸도 건강해지기 시작했다.
불교에서 일체개고(一切皆苦)라는 말이 있다. 삶은 모든 것이 苦라는 것이다. 많이 들어오고 알지만, 너무 약한 인간이기에 고통을 환영하며 맞이하기는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 철이는 곰에게 타격을 받아 고통스러울 때, 구조를 요청하면 영생하게 되는 기계 지능 네트워크 상태로 돌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죽음과 고통의 시간을 피하지 않는다. 몸도 없고 다양한 아픔과 고통이 없는 존재의 개별성을 잃어버린 삶은 죽은 것과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고통과 죽음을 통해 진정한 인간이 되고 싶었던 철이를 보며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떠올랐다. 고통과 죽음은 우리 곁에 있으니 피하기보다 다음의 더 큰 고통의 예방주사라고 생각해 보는 것이다.
“생의 유한성이라는 배음이 깔려 있지 않다면 감동도 감흥도 없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 때문에 생이 한 번뿐이기 때문에 인간들에게는 모든 것이 절실했던 것이다.”철이의 깨달음을 보며 우리 모두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모든 순간이 소중하고 값진 경험이라 생각하고 아쉬운 만큼 더 열심히 잘 느끼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삶은 누가 대신 살아줄 수도 가르쳐줄 수도 없이 자신이 온몸으로 느껴야만 알 수 있는 것 같다. 기계처럼 일률적으로 프로그램을 짜서 정답을 정해 줄 수 없고, 각자가 다른 무게로 느끼고 통과해 가야 하는 오류 투성의 유기체이다.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인공지능의 발전단계가 엄청난 속도로 진화하고 있다고 한다. 인공지능의 미래에 대한 낙관론과 비관론이 대두하면서 염려되는 것은 ‘과연 인간을 대체할 수 있는가’일 것이다. 인지적인 기능은 이미 인간을 뛰어넘고 있지만, 마음만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만약 인간이기 때문에 느끼고 힘들고 즐겁고 하는 감정까지 포기하고 일률적으로 통제하려 한다면, 작별인사에서처럼 인간도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두려워했던 고통이 없었다면 지금의 일상의 소중함을 감사하며 즐거워하는 우리가 없을 것이고, 기계처럼 하루하루 느끼지 못하고 살았을 것 같다. 지인의 말씀 중에 인생의 겹이 너무 여러 개라 사람의 무늬는 한가지로 알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런 다양성과 모호성 때문에 삶에는 희망이 생기는 것 같다.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는 것에 에너지를 소비하고, 행복하지 않다고 불평하기 전에 내가 가진 것에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들인다면, 곁에서 부는 시원한 바람이 있었다는 게 느껴질 것이다. 철이가 인간으로 마지막까지 느끼고 싶었던 오감과 죽음의 고통을 당당히 맞이하는 게 어쩌면 그것에서 벗어나는 열쇠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