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옥곡재 Mar 13. 2022

옥인아파트

3. 옥인아파트의 역사

이쯤해서 옥인아파트의 역사를 알아보는 게 좋겠다. 여기서 미리 분명히 밝혀두고자 하는 점은 아파트가 지어질 당시 내가 열 살도 안 된 시점이라 여러 자료들을 섭렵한 후 어릴 때의 기억과 어른들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살짝 버무렸다는 것이다. 


옥인아파트의 정식 명칭은 옥인시범아파트다. 아파트 앞에 '시범'이라는 말을 넣었다고 하니 이상하다 싶겠지만 정부 주도로, 모름지기 '아파트란 이런 것이다'라고 하는 시범적 성격이 강한 주택건설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 지금은 서울시 강남을 비롯하여 사람들이 몰려 사는 곳은 전국 어디나 빽빽한 아파트 숲이지만 당시는 아파트가 매우 드물었다.


서울시는 시내의 판잣집, 불법불량건축물 등의 정리와 서울시 변두리로의 인구분산을 위한 주택정책의 하나로 1969년부터 시행된 '2,000동 시민 아파트 건설계획'의 일환으로 아파트를 짓기 시작했다. 그런데 1970년 4월 마포 와우아파트가 어이없게 와르르 붕괴되었다. 서울시 주도로 지은 아파트가 붕괴되다니! 체면을 구긴 서울시는 안전을 최우선으로 고려한 아파트를 다시 짓기 시작했는데, 바로 옥인아파트였던 것이다.   


1970년 3월 18일 조선일보에 따르면 옥인동에 아파트를 짓기로 계획했지만 아파트 붕괴사고의 여파로 옥인동에 지을 예정이던 아파트 건립계획이 취소되었지만, 1971년 새로 취임한 양택식 서울시장 체제에서 '중산층 아파트'로 분양되었다고 한다. 당시 옥인동 아파트는 도심에서도 가깝지만, 물 좋고 산 좋은 인왕산 계곡을 끼고 건립하는 것이었기에 장안의 화제였다고 한다.


그런데 '중산층 아파트'가 어감이 좋지 않았는지 ‘시범아파트’라는 명칭으로 변경됐고, 9개 동 308세대의 ‘옥인시범아파트’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 아파트 족보에 올랐지만 정작 살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냥 옥인아파트라고 불렀다. 옥인아파트는 살아봐서 알지만 정말 튼튼하게 지어졌다. 100년은 끄덕없이 버틸거라 생각했는데, 안전 때문이 아니라 자연경관을 이유로 철거되었다. 


세월이 흘러 2000년대에 들어서자 옥인시범아파트가 인왕산 경관을 훼손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계곡을 콘크리트로 덮었고 건물들이 인왕산의 전경을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이곳을 원래 모습으로 되살려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수성동계곡에서 40년 동안이나 서울시를 내려다 보았던 옥인시범아파트는 2007년 12월 7일 서울시의 공원 조성 방침에 따라 결국 철거하기로 결정되었고, 옥인아파트는 2008년 8월 말부터 철거를 시작해 2012년 7월 11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철거 과정에서 확인된 놀라운 일이 언론을 통해 세상에 공개됐다. 정선의 그림 속에 나오는 기린교가 발견됐다는 보도였다. 기린교는 1970년대 초 아파트 건립 과정에 파괴돼 없어졌다고 알려져 있었는데, 그 기린교가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문화일보는 “정선의 그림이나 <서울 육백년>에 실린 사진을 보면 장대석 2개를 걸쳐 놓은 돌다리의 모습이 현재 옥인아파트 옆 계곡에서 발견된 것과 똑같은 형태임을 알 수 있다.”며 “청계천의 원류가 되는 계곡에 위치한 기린교는 원래 1971년 옥인아파트 준공 당시 사라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이 지역을 답사했던 사람들의 제보로 다시 햇빛을 보게 됐다.”라고 전했다. 


이런 기사들와 관련하여 일부 언론의 호들갑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기린교, 아니 우리가 부르던 이름 돌다리는 원래부터 그곳에 있었다. 없어졌던 것, 다른 데로 옮겨 졌던 것을 돠찾은 것이 아니라 그자리에 쭉 있었던 것을 발견이라니 실소가 나왔다. 옥인아파트에 살았던 아이들 중 많은 아이들이 그 다리를 한 번쯤 지났을 테고, 당시 9동에 살았던 주민이 다리 위에 항아리와 화분들을 늘어 놓아 통행이 불가해졌을 뿐이지 돌다리는 늘 그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옥인아파트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이런 언론의 보도와 세간의 이야기가 기린교 존재에 자체에 관심도 없었다가 갑자기 호들갑을 떠는, 어이없는 일로 여겨졌다. 


정선 <장동팔경첩(壯洞八景帖) 수성동계곡(水聲洞溪谷)>

이 그림을 보자, 지금의 수성동계곡과 다름이 없다. 서울시에서 옥인아파트를 철거하고 공원으로 조성할 때 이 그림을 참고했다고 한다. 그림 속에도 계곡 위에 크기가 같은 두 개의 돌다리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정선이 옥인동 아래에 살면서 이 그림을 그렸던 그 때부터 지금까지 300년이란 장구한 세월을 끌어앉고 누워있다. 어릴 때야 정선이 조선시대 유명 화가였다는 것만 알았지 그의 작품을 감상할 기회도 생각도 없었다. 나이가 들어 전통그림에 관심이 생긴 후 정선이 같은 동네 형님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느날 이 그림을 처음 마주했을 때, 나는 한번에 '어! 이거 우리집인데... 돌다리가 그 때도 있었네.'라는 혼잣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이거야 말로 돌다리를 기린교로 재발견한 일이고 뉴스에 나올 법한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랬다. 내가 살던 곳, 내가 매일 다니던 그 길가의 계곡이 물소리가 너무 좋아 수성동계곡이라고 명명되었다는 것을 그땐 몰랐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기린교 조금 아래에서부터 계곡은 보이지 않는다. 계곡은 시멘트로 덮어졌고, 맑은 소리를 간직한 계곡물은 찻길이 되어 버린 그 아래로 흘러흘러 청계천에 이를 것이다. 


옥인아파트가 있던 자리, 내가 살던 그곳, 수성동계곡이 2010년 10월 21일에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1호로 지정되었다. 수성동 계곡은 지금은 철거되고 없어진 종로구 옥인동의 옥인아파트 자리에 복원되었다. 계곡의 길이는 약 190m이고, 폭은 4.8∼26.2m이다. 과거의 모습을 간직한 돌다리 1기가 남아 있다.


나는 옥인아파트를 설계한 사람이 누구인지 만나면 커피라도 한 잔 사고 싶다. 지금의 기준으로 생각해도 친환경적으로 설계했기 때문이다. 대개의 경우 산 등성이를 잘라낸 후 계곡이든 바위든 모두 평평하게 만든 후 가로로 줄지어 건물을 배치하기 마련인데 옥인아파트는 달랐다. 굴곡진 계곡을 따라, 산의 높낮이에 따라 아파트 건물을 세로로 배치하여 자연경관을 살리는 동시에 자연의 파괴를 최소화했기 때문이다. 가로로 배치한 건물은 1동이 유일한데, 이것도 치마바위 아래 자연과 조화롭게 들어서 있었다.






작가의 이전글 옥인아파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