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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쓰면 뭐가 남더라

방문자 '0'인 블로그에 계속해서 글을 쓰는 이유

by Jedy



비공개 글만 가득한 나의 블로그에는 오래된 기록들이 가득하다. 드물게 아직까지도 공감 가는 글이 있는가 하면, 대부분은 눈 뜨고 볼 수 없는 흑역사다. 오늘도 어김없이 과거의 나는 어떤 흑염룡을 품었었나 궁금해하며 블로그에 들어가 본다. 오늘의 방문자 ‘0’, 여전히 타인의 관심 따윈 찾아볼 수 없다. 익숙하게 스크롤을 내려 내가 쓴 글들을 확인했다.



최신 글이 제법 기똥차다.

[공유] <재벌집 막내아들> 송중기 움짤 모음. GIF


앗, 얼마 전 잠깐 스크랩해뒀는데 삭제하는 것을 깜빡했다. 아무도 볼 수 없는 비공개 글이지만 왠지 모를 수치심에 당장 글을 삭제했다. 스크랩 글을 삭제하고 특별히 ‘미자 시절 습작 모음’ 카테고리를 클릭했다.

스크롤을 한참 내려 오래된 단편 소설 하나를 찾았다. 제목부터 읽어 보는데 어김없이 웃음이 터진다. 이때의 나는 제목을 지을 때 남다른 기준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

‘깨단의 길잡이 나비’, 독특하거나 남들은 잘 모르는 단어를 고집하던 버릇이 뻔히 눈에 보였다. 하지만 그 시절의 나는 몰랐을 테다. 이 블로그에는 훗날 ‘[공유] <재벌집 막내아들> 송중기 움짤 모음. GIF’ 같은 글이 꽤 자주 투척될 것이라는 사실을.





당시 나는 ‘총천연색’이나 ‘노을’ 같은 빛깔의 표현을 좋아했고 제목은 꼭 순우리말로 지었다. 글의 주제는 항상 ‘꿈’이었다. 돌려 말하면 꿈이 많고 동화처럼 무해하거나 예쁜 것에 환상을 가진 학생이었다. 능력치 쌓는 데에만 혈안이 오른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이 안 가는, 순수했던 시기였음은 확실하다. 그랬던 사람이 어떻게 이런 사람이 됐지. 나는 블로그에서 과거의 내가 쓴 글을 읽을 때마다 깨닫는다. 꿈 같은 건 잘 때나 실컷 꾸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지금의 나인데, 과거엔 좀 달랐다고.


스물네 살의 내가 불편하지는 않다. 몽상가였다가 모험가로 바뀐 시기는 스무 살이다. 서울에 상경해 지독한 경쟁 주의 사회에 내던져졌더니 헤헤, 실실 웃는 성격이 고쳐졌다. 알고 보니 경쟁 심리가 나랑 또 잘 맞더라고. 하릴없이 침대에만 누워 있던 사람이 적수 하나 만났다 하면 미친 굴착기처럼 할 일을 퍼다 나른다. 곧 죽어도 뒤처지긴 싫은 거다. 쌓인 업무는 덤이다. 근데 또 쌓아 놓은 업무를 보면 괜한 포만감이 느껴지는 게, 바뀐 성격이 나랑 딱이다.


이제는 경쟁 심리가 그득그득한 사람이 되어, 여러 모임의 구성원으로서 회고할 내용들을 일기로 남기는 현대인으로 살고 있다. 블로그 포스트들을 최신 정렬로 해놓고 보면, ‘환승연애 과몰입하게 만드네?’와 같은 일상 이야기한 줄 정도를 빼놓고선 ‘업무에 대한 피드백이 구리다.’ 따위와 ‘동료의 병크에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학보사 1년 차의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햄버거 인생!’ 같은 회고록이 전부이다. 퍽 현실적인 사람이 되었다. 오늘의 기념품을 남긴다는 생각으로 일기를 써보라던 누군가의 조언이 떠오른다. 연말 정산할 때 받을 기념품이 불평, 불만이라니.


나 자신에게 조금 가혹하다는 생각이 든다.



허황된 꿈만 이야기하던 16살의 나를 종종 찾아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스스로에게 냉철한 지금의 나에게 한결 따뜻했던 어린 나의 입을 빌려 위로를 주려고.

그때의 일기를 읽다 보면 얻어지는 것이 딱 하나 있다. 오? 나 꽤나 당돌했고 따뜻한 사람이었군, 하는 소감 같은 것. 그 소감이면 충분했다. 실제로 일을 끝내고 집에 돌아왔을 때의 일이다. 피곤에 절어 맥주 한 캔을 벌컥벌컥 마신 뒤 두 캔째를 고민할 때 블로그의 오래된 일기를 읽고 나서 선택이 바뀌었다. 거지 같은 인생! 빌어 먹을 경쟁 사회! 온갖 악에 받친 비속어를 읊조리며 더 쓴 소주 향하던 손이, 나도 모르게 달달한 콜라를 집어 들게 만든다.


그 시절의 기념품은 달달한 칭찬이었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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