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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무와의 출장기

이번 글은 전무 얘기입니다.

상무와 다녀온 출장은 당연하게도 아무런 성과가 없었고 성과 없는 출장에 전무는 더더욱 마이크로 매니징을 하기 시작하시더군요.

그러면서 전무는 저기 어디 먼 나라에서 지시를 하고, 상무가 내는 더더욱 알 수 없는 의견을 받들어 국가별로 시장조사 내용을 수정하다 보니 보고서가 산을 가다 못해 지구에서 좌표마저 잃어버릴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전무가 관련 시장을 보려면 싱가포르를 가야 한다고 출장준비를 지시하면서 국내 사업팀장을 불러 같이 가야 한다고 통보하더군요.

해외사업과 관련된 출장이라 상무가 같이 가는 게 맞는데 뜬금없이 국내팀장이 같이 가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국내팀장도 본인이 가는 출장이 맞냐고 저에게 확인할 정도로 이상하긴 했죠.


그리고 지난번에 말도 많았던 호텔 예약도 전무한테 물어봐서 본인이 가고 싶은 곳으로 가면서 전무는 아주 만족스러운 출장이었던 것 같은데 전무까지 간 출장에 소득이 없었다는 게 문제였습니다.

전무 본인이 만나고 싶은 회사는 다 만났지만 상대방이 보기에 우리 쪽이 경험도 없고 준비가 덜 되어 있다고 생각했는지 만나서 인사 정도 하는 미팅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현지 출장 결과는 시장 조사하면서 알게 된 회사를 만나봤다는 수준으로 처참했고 당연히 새로운 사업기회라던가 시장정보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출장 결과에 나름 걱정이 되어서 같이 출장 간 전무와 팀장에게 이러이러한 내용으로 출장보고서를 쓰겠다고 귀국하기 전에 보고를 하고 전무와 팀장의 의견을 수렴해서 귀국하자마자 출장보고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썼듯이 출장의 결과물이 없다 보니 내용을 늘리고 늘려서 겨우 A4 3장 정도의 보고서 초안을 전무한테 보고했더니 처음엔 잘했다고, 내용만 몇 개 더 추가하라고 지시하더군요.

전무의 의견을 반영한 보고서를 다시 작성하여 다음 날인가 보고했더니 출장 성과가 얼마나 많은데 이것밖에 못 쓰냐고 머라고 하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기억력에 문제가 있나 의심스러웠습니다. 


일단 보고서는 완성을 해야 하니 전무의 말을 들어보니 새로운 유명한 회사도 찾았고(도대체 어느 회사지?) 새로운 사업기회도 찾았다는(새로운 식당은 찾았지) 식으로 쉽게 말해 출장 결과를 부풀리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보고서를 처음부터 다시 쓰기 시작했고 다 쓰고 나서 보고하면 지금처럼 다 틀렸다 할까 봐 중간중간에 보고를 했더니 그때마다 추가사항이 나왔습니다.

그 사항들을 다 반영했더니 출장보고서가 아니라 출장 때 하지도 않았던 제가 했던 국가별 시장 조사 결과와 만났던 업체들에 대한 분석 그리고 국가별로 예상되는 수익성(이건 상상을 넘은 망상 수준이었습니다.) 등이 들어가는 사업기획서가 되고 이 보고서가 만들어지기까지 2달이 걸리더군요.

출장의 결과로 사업기획서가 만들어지는 건 괜찮은데 사업기획서에 할 수 있다고 쓰인 사업기회가 실제로는 없거나 우리가 참여하기 힘든 조건이라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렇게 출장에 대한 대서사시를 만들었으니 화려한(?) 출장 결과를 전무가 위에 보고를 해야 되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보고를 못 하더니 결국 그 보고서는 쓰레기통으로 처박혔고 차라리 보고라도 하고 깨지기라도 했으면 아쉽지나 않을 텐데 몇 달 고생한 게 없어져버리니 기분이 참 뭐 같았더군요.


전무를 백번 이해해본다면 출장을 다녀와서 어떻게든 성과를 만들어 보고를 해야 하는데 정말 아무것도 없으니 기획서로 방향을 틀었고 그러다 보니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을까 하는데…

저도 잘은 모르지만 보고는 일이나 사건이 발생했을 때 완벽하지 않아도 적기에 보고해야 되는데 이 양반은 몇 번이나 뜯어고치다가 보고도 못 했고 덩달아 밑에 있는 사람은 아무 소득도 없이 몇 달 고생만 시킨 결과를 만들어 버린 걸 보고 전무의 능력에 대한 실망도 참 컸었습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동남아 사업을 해야 한다고 부르짖던 사람이라 다음번에 올 기회를 잘 만들어야겠다 하고 마음을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 사업기회가 들어왔는데 본인이 그때까지 했던 말을 돌이켜보면 미국 사업을 하는 팀에 업무를 넘기던지 아니면 기회를 놓치기 싫었으면 최소한 동남아와 미국을 같이 했어야 했는데 말을 싹 바꿔서 미국 사업이 우리가 가야 할 길이라고 동남아는 안 해도 미국은 무조건 한다고 떠들고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미국 사업이 생명의 동아줄인 것처럼 붙잡는 동안 동남아에서 사업하겠다고 벌여놓은 일들은 나 몰라라 했고 상무도 미국이 좋아 보였는지 덩달아 따라가면서 뒤처리는 제가 다 해야 했습니다.


그렇게 동남아를 버리고 한 미국 사업이면 잘 좀 하던가 전무와 상무 둘 다 사업을 해본 경험이 없으니 회의를 할 때마다, 보고자료를 만들 때마다 도움이 안 되는 말만 했다고 하고 미국 사업개발을 지원해주는 부서에서 전무한테 그렇게 사업 개발하면 안 된다고 공개적인 자리에 무사하기도 했다고 하더군요.

결국 경험 없는 사람들이 주물럭거리던 미국 사업도 망가져서 폐기 처분되었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회사에서 일을 하는데 과거에 무엇을 해봤다던지 어떤 경험이 있다는 얘기보다 국내외 좋은 학교를 나왔다던가 대단한 회사를 다녔다고 본인이 자랑하고 다니는 사람은 한 번씩 의심하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일을 잘할 수도 있겠지만 저의 경험으로는 그런 사람들은 거의 100% 일을 못 할뿐더러 일을 망가뜨리더라고요.



#회사생활#전무#출장#보고서#사업개발#스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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