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임없이 질문하라
한 달에 천만 원을 버는 25살은 절대 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올해 2023년 11월, 월 수입 천만 원을 달성했고 다음 달인 12월도 천만 원의 수입이 확보되었다.
나는 요리사, 고등학교 자퇴, INFP, 돈 이랑은 아주 거리가 멀었던 25살 남자였다.
이 글에서는, 내가 월 천만 원을 벌기까지의 과정을 세세하게 나눠서 이야기하고,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각자 본인이 몸담고 있는 분야에서도 적용할 수 있는 실용적인 지식과 팁을 나누려고 한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나는 MBTI F형의 인간이고, 뜬구름 잡는 마인드셋, 동기부여 같은 얘기도 개인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이 글에선 MBTI 극 T 유형의 사람들조차 이해하기 쉽게끔 논리, 수리, 통계, 객관적인 근거와 팩트, 그리고 그걸 나에게 어떻게 적용했고, 월 천만 원이 어떻게 가능한지 설명해보려고 한다.
지금은 많은 부자들이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돈 버는 방법에 대해서 강의하고 알려주는 세상이다.
먼저 이 글을 읽는 모두가, 돈을 버는 방법에는 절대적인 정답이 없다는 것을 인지하고 이 글을 계속 읽었으면 좋겠다.
지금도 저자는 끊임없이 배우고 부딪히고 성장하면서 열심히 목표를 이루어가는 중이다.
25살에 월 천만 원을 달성한 유명하지도 않은 한 청년이 여기까지 오는데 어떤 생각들을 했고 무엇을 배우고 깨달으면서 왔는지를 나눌 뿐이고, 이 글이 필요한 이 세상 몇몇 독자들이, 각자 본인 인생에 적용할만한 "개꿀팁"들을 잘 찾아가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이건 시간이 걸리는 일이고, 말도 안 되는 노력을 쏟아부어야 하는 일인건 분명하지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란 걸 말하고 시작하고 싶다.
나는 서울 쌍문동에서 태어나 8살 어린 나이에 필리핀, 싱가포르를 거쳐서 캐나다로 이민을 오게 되었다. 거의 10대 전체는 싱가포르에서 부모님 없이 혼자 지냈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우리 집이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맞벌이 부모님 덕분에 홈스테이 비용만을 간신히 지원받아 외국에 나와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그마저도 부모님이 이혼하시게 되어서 나는 싱가포르 공립학교를 입학하지 못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야 할 상황이었다고 했다. 그런데 어찌어찌 열심히 해서 공립학교에 입학을 해 어머님께 조금이나마 부담을 덜어드릴 수 있었다.
그 당시에 싱가포르에 사는 많은 외국 유학생들은 집이 잘 사는 경우가 굉장히 많았다.
2012년도 기준 중학생 한 달 생활비 + 용돈으로 50~70만 원 정도가 기본이었고, 노트북 MP3, 스마트폰 같은 전자기기는 별도로 지원받는 아이들이 99.9% 였다. 나는 어머니께 생활비 + 용돈으로 당시 20만 원을 받았고, 교통비, 교내식비를 제외하면 당시 환율로 친구들이랑 한 달에 한번 간신히 영화 보고 밥 한번 먹을 수 있는 돈이었다. 그래서 15살에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각자 여러 성장환경에 따라 각자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겠지만, 나는 쌍문동 친구들 사이에서는 유학이란 걸 갈 수 있는 부잣집 아들, 싱가포르에선 친구들이랑 영화 한번 보기 힘들어하는 못 사는 집 자식인, 상대적 빈곤이라는 걸 경험했다.
나의 첫 알바는 싱가포르 오차드 중심지에 있는 브런치 레스토랑의 서포트스탭 (Support Staff)이었다. 이름만 화려하지 그냥 보조원다. 재료배달 오면 주방에 옮겨주고, 홀 서버분들이 필요한 식기구들 가져다 드리고, 구석구석 청소하고, 한마디로 잡다한 일만 하는 포지션이다. 주 3일, 하교 후 오후 5시부터 밤 10시까지 일했다.
그렇게 나는 한 달에 50만 원 정도의 돈을 벌면서 겨우겨우 친구들이랑 비슷한 소비 수준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첫 50만 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의 희열이었다. 마치 내가 내 친구들만큼의 재력을 갖춘 거 같은 느낌도 들고, 이제 용돈조차 안 받아도 될 거 같은, 갑자기 성숙해진 기분마저 들었다.
캐나다에서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난 후에도 꾸준히 주방에서 일을 했다. 그때는 본업으로 요리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고 단지 용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었다. 아르바이트를 일찍 시작하는 다른 학생들과 별 다를 거 없는 고등학생이었던 거 같다.
고등학교 2학년, 남들이 대학진학을 고민하는 시기에 나는 결단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왔다. 경력을 인정받아한 치킨집에서 주방 매니저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큰 레스토랑에서 일을 하는 선배님들이 주변에 많이 생겼던 상황이라 제대로 된 레스토랑에서 일을 할 기회가 생겼다. 고등학교졸업, 대학진학, 영주권, 비자 등등 당시 여러 가지 체류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학진학이 필수였지만, 나는 과감하게 고등학교마저 자퇴하고 요리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나의 고등학교 마지막날은, 수업 중 쉬는 시간 종이 울리자마자 덤덤하게 나와 뒤도 안 돌아보고 그대로 주방으로 향한 날이었다.
그렇게 주방에서 정말 열심히 일했고, 또래 20대 초반 친구들보다 일찍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남들이 술 마시고 놀 때 나의 20대 초반은, 하루 평균 15시간, 주 5-6일씩 주방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5년 차 때 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수셰프로 근무 중이던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나?"
물론 요리도 좋고 주방일도 재밌었지만, 금전적인 것이 충족되지 않았다. 월세내고 기본적인 식비를 내면 아무리 해도 내 개인생활을 즐길 만큼 여유가 안 되는 거였다.
월급: 300만 원 (캐나다 평균 월급)
월세: 150만 원 (캐나다 최저월세)
식비: 70만 원
교통비: 15만 원
기타 지출: 20만 원
남는 돈: 45만 원
글쎄... 한 달에 40-50만 원 모아서 언제 천만 원 만들고 언제 1억 만들 수 있을까...?
이 생각을 했을 때가 22살이었다.
여기서부터 재밌어진다.
자, 재미있는 일을 하고 있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일을 하고 있는데, 돈을 못 번다.
그러면? "왜 돈이 안 벌리지?"라는 질문에 대한 원초적인 궁금증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 99.9%의 사람들은 "원래 내가 하는 일이 그래, 나는 돈이랑 안 친해, 돈의 속성은 나쁜 거야, 등등등 별 이상한 이유를 만들어내면서 본인의 마주한 문제를 철저히 외면한다. 그래서 마인드셋을 바꾸고 훈련하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 부분은 여기서 다루지 않겠다.)
"왜(Why)"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
"왜(Why)"라는 질문 이후에는 "어떻게(How)"와 "무엇(What)"이라는 질문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1차 질문:
돈이 왜 안 벌리지?
왜 이거밖에 못 벌지?
왜 나는 가난하지?
왜 똑같이 일하는데 나는 덜 벌지?
2차 질문:
돈이 왜 안 벌리지? -> 돈을 어떻게 더 벌지?
왜 이거밖에 못 벌지? -> 돈을 이거보다 어떻게 더 벌지?
왜 나는 가난하지? -> 어떻게 가난을 벗어나지?
왜 똑같이 일하는데 나는 덜 벌지? -> 어떻게 똑같이 일하고 더 벌 수 있지?
3차 질문 -> 돈이 도대체 뭐야??
끊임없는 질문을 계속 스스로 하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의 핵심이다.
돈의 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하다 보면 그 질문에 대한 해결방법을 자연스럽게 찾게 된다.
여담이지만, 정규교육, 즉 공교육의 본질은, 정답과 오답을 잘 구분해 내는, 그리고 시키는 것을 정해진 규정 안에서 잘 수행해 내는 능력을 키우는 곳이다. 쉽게 말해 성실하고 능력 있는 노동자를 양성하는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공교육은, 공교육에 오래 노출되어 있는 일반 사회인들의 정답과 오답을 구분치 않고, 호기심을 가지고 끊임없는 질문을 하게 만드는 능력, 즉 주체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떨어뜨린다.
"정규 교육 속에서 호기심이 살아남는다는 것은 일종의 기적이다" - 알버트 아인슈타인
다음 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