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Hey, don’t shoot!

아크레이더스(Arc Raiders) 성공 이면의 커뮤니케이션 UX 이야기

by 버터멜론

게임에 관심있으신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2025년 연말 탈출-슈터 장르의 어떤 게임이 큰 돌풍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출시 2주만에 동시접속자 70만명(콘솔 포함)을 찍고, 한달이 지나 700만장 이상 판매하였다고 할 정도로 오랜만의(?) 글로벌 히트 게임이 나타난 것이죠. 불과 2년 전 The Finals라는 게임을 깜짝 출시하고 스팀 동접 20만을 찍었으나 핵 이슈로 잠잠해진, 바로 그 스웨덴의 Embark Studio가 개발한 신작 게임 'Arc Raiders' 입니다.


arc-raiders-social.jpg


성공적인 런칭, 엄청난 흥행과 열화와 같은 바이럴 이면에는 분명 이 게임만의 차별화된 재미, 눈부신 그래픽과 몰입감 높은 사운드, 거기에 완벽하다고 얘기하는 최적화 까지,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겠지만, 제게 있어 무엇보다 신선하게 다가온 한 가지는 'Don't Shoot!' 이라는 게임속 이 한마디 외침입니다.


Extraction Shooter 장르인 아크레이더스는 외부를 탐사하며 필요한 재화를 획득(Extract)하고 살아서 돌아와야 하는 목적을 갖고 있는 PvPvE 게임인데요. 게임을 플레이 하다 무시무시한 아크(Arc, 세상을 침공한 기계이자 적) 뿐만 아니라 같은 목적을 가진 레이더(Raiders, 탐험 과정에서 경쟁자이자 적)를 마주하는 경우가 반드시 발생하게 됩니다.


kNjhUEVGnkBRSrdTKJUDHg.jpg 아크레이더스 뉴비 절단기 리퍼(Leaper)


유저들은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눌 수도, 반대로 싸움 없이 각자의 길을 향할수도 있는 선택의 순간을 마주하는데요. 그 상황에서 'Don't Shot!'이라고 외칠 수 있는 Emote 기능이 게임에서 존재합니다. 쏘지 말아달라는 부탁, 나도 쏘지 않겠다는 약속 안에서 복잡한 계산과 긴장이 뒤섞인 장면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그 이후 발생하게 되는 인생의 서사와 같은 여러 극적인 상황들이 재미로 작용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Don't Shoot Dial.jpg



한 판의 경험을 풍부하게 만드는 것들, ARC RAIDERS


"협력 게임에서 커뮤니케이션은 중요합니다." 라는 말은 너무 당연해서 새삼스럽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중요성은 단순히 한 판을 이기기 위함의 목적을 넘어 라운드에서의 경험을 풍부하게 하는데 있어 소통이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저는 라운드에서 지더라도 '아 정말 아쉽게 졌다, 다음에는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인게임 경험이 '이겼으니까 한 판 더'보다 더 값진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승리에 대한 쾌감 만큼이나, 패배로 인한 결핍도 지속 플레이를 위한 강력한 동기가 될 수 있음)


이와 같은 관점에서, 말 한마디 없이 각자 제 갈 길만 가는 스쿼드와, 간단한 핑과 이모트, 최소한의 합의라도 오가는 팀은 전혀 다른 기억으로 남습니다. 단순히 적의 위치를 알려주고 루트를 제안하는 기능적인 레벨을 넘어서, "저기 루팅할게 있어.", "적이 있으니 그쪽으로 가지 말자"와 같은 짧은 피드백만으로도 한 판의 경험은 크게 달라집니다. 게임 속 커뮤니케이션의 빈도나 양(Quantity) 보다는 맥락이나 질(Quality)이 한 판에 대한 만족도를 높이는데 더욱 중요하다는 여러 연구 자료도 이를 방증하고 있는것이 아닐까 합니다. 결국 유저가 입체적인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적절한 방식의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제공하자라는 것이 현대의 게임 개발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image_195d7d8ba3404f5b834d657c05d47b90.png Wanna team up? / 출처: nexon.com



하지만 음성 채팅이 모든 걸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그럼 "게임에서 음성 채팅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자?" 현실적으로는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음성 채팅은 분명 강력한 도구이지만, 동시에 여러 제약을 안고 있는 수단이기도 합니다. 먼저 물리적인 장벽이 있습니다. 마이크와 헤드셋과 같은 장비를 보유하고 있어야 하고요, 설령 장비가 있더라도 주변 환경이 시끄러워 소통이 어렵거나, 반대로 너무 조용해서 말을 꺼내기 어려운 상황도 있습니다. 음성 채팅은 무엇보다 심리적인 장벽이 생각보다 큽니다. 자신의 목소리를 낯선 사람들에게 계속 노출해야 하는 부담, 성별이나 나이, 억양이 그대로 드러나는 것에 대한 불편함, 목소리로 공격 받는 것에 대한 걱정도 존재합니다. 실제 조사에서도, 자신의 정체(성별·나이 등)를 드러내기 싫어서 음성 채팅을 활용하지 않는 유저들이 적지 않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6116da8fe318cb3f71d95fe3_1_Pn7Cp-mxO4NcEhc35GMQKQ.jpg 음성채팅 서비스 디스코드


이렇듯 음성 채팅은 강력하지만, 누구에게나 항상 편안한 도구는 아닙니다. 결과적으로 게임 안의 커뮤니케이션 니즈는 여전히 존재하는데, 그 니즈를 모두 음성 채널 하나로 해결하기는 어렵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등장한 것이 이모트, 핑 커뮤니케이션, 퀵 커맨드와 같은 UI 기반 커뮤니케이션 시스템입니다.



이모트와 핑 커뮤니케이션이 만들어 낸 새로운 레이어


이런 문제의식 속에서 Apex Legends의 핑 시스템은 하나의 전환점 같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음성을 쓰지 않고도, “여기 적 있음”, “이쪽으로 이동하자”, “이 아이템은 필요 없다”와 같은 핵심 정보를 전달할 수 있도록 한 것이죠. 중요한 것은 이 시스템이 단순한 편의 기능을 넘어, “말을 하지 않아도 팀에 기여할 수 있다”는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냈다는 점입니다. (참고로 EA는 이러한 핑 시스템 개발 이후 특허로 출원하였고, 추후 모든 게임사가 적극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끔 특허를 공개하였습니다.)


https://youtu.be/AthWmMky8b4

Our Patent Pledge for Increasing Accessibility


핑과 휠 기반 커뮤니케이션은 시간이 지나며 여러 게임에서 기본 기능처럼 자리 잡았습니다. Fortnite, Overwatch, LoL, PUBG 등 다양한 게임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이를 도입했고, 이제는 핑이 없는 온라인 멀티플레이 게임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c7l5dG0X.jpg 이미지출처: https://pubg.com/en/news/7810


Arc Raiders 역시도 핑 시스템을 게임 속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습니다. 다만 이 게임이 흥미로운 지점은, 단순히 '정보 전달 수단으로서의 핑'을 넘어서, 감정과 전략이 섞인 감정-전략형 이모트라는 레이어를 더 강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를 들어, 앞서 언급한 "Don’t shoot!" 이라던가, "같이 플레이 할래?" 라는 "Team up?"과 같은 표현들은 그 자체로 감정표현이면서 동시에 전술적인 신호이고, PvPvE라는 장르 특성 속에서 플레이어 간 협상의 도구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감정-전략 이모트가 가진 매력과 위험


"Don’t shoot"은 언뜻 보면 단순한 감정 이모트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 플레이 상황에서 이 말은 생존률, 리소스 관리, 다음 전투의 리스크 등을 계산한 끝에 나오는 선택에 가깝습니다. 싸우지 않고 지나치는 것이 서로에게 더 이득인 상황, 체력과 탄환이 부족해서 싸우기엔 손해가 큰 상황, 혹은 다른 목표를 향해 서둘러 움직여야 하는 상황에서 이 이모트는 작은 휴전 요청이 됩니다.


문제는 이 휴전이 언제든 깨질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서로 "쏘지 말자"고 했지만, 상대가 그 틈을 타 먼저 발포하는 장면은 자연스럽게 발생합니다. 그렇게 한두 번 배신을 경험하다 보면, 유저는 점점 이 시스템 자체를 신뢰하지 않게 됩니다. 감정-전략 이모트가 협력을 가능하게 하는 장치이자, 동시에 "착한 사람이 손해 보는 구조"를 확인시켜주는 장치가 되어버리는 것이죠.


이러한 경험이 반복되면, 결국 유저의 기본값은 “일단 믿지 말자”로 수렴하게 됩니다. 커뮤니케이션 툴이 오히려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불신을 키우는 상황이 될 수도 있습니다. UI나 UX의 설계가 의도와는 다르게 작동하는 지점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https://youtu.be/YWt5FMxVsvw?si=_VZQQv8qZgF7PEmb



배우지 않은 시스템은 실전에서 힘을 잃는다


또 하나 눈에 들어왔던 부분은, 이 감정-전략 이모트 시스템이 게임 플레이 전 충분히 학습되지 않은 상태에서 유저들에게 던져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휠을 어떻게 여는지, 어떤 문장이 있는지, 어떤 상황에서 쓰일 수 있는지는 어느 정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 시스템이 실제 게임 플레이에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플레이를 통해 몸으로 부딪쳐 보면서야 알게 됩니다.


여기서 하나 떠올랐던 질문은 이것입니다. "이러한 감정-전략 이모트의 기능과 역할을, 본격적인 게임 플레이 전에 충분히 학습시킬 수 있다면 어떨까?" 실제로 게임 스트리머 @CohhCarnage 역시 Arc Raiders를 플레이하며, 튜토리얼 단계에서 이런 커뮤니케이션 기능을 좀 더 충분히 설명해 줄 필요가 있다고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이 버튼을 누르면 이모트 휠이 열립니다" 수준이 아니라, 예를 들어 튜토리얼 안에 작은 시나리오를 하나 구성해 놓고, 어떤 상황에서 "Don’t shoot!"이 의미를 갖는지, 협력이 어떻게 득이 되고 언제 리스크가 되는지를 미리 경험해 보는 것입니다. 유저가 이러한 상황을 미리 경험해 볼 수 있게 한다면, 감정-전략 이모트 시스템은 지금보다 더 설득력 있고 풍부한 도구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배우지 않은 기능은 있어도 없는 것과 같고, 충분히 학습된 기능은 플레이어의 선택지로 편입되기 때문입니다.



'전술-감정 대화' 의 폭을 넓여 보는 상상


Arc Raiders의 이모트 휠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이 시스템이 더 확장될 수 있는 여지도 많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Don't shoot!", "Team Up?" 뒤에는 사실 더 많은 변주가 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아크 같이 잡을래?", "나좀 도와줘(살려줘)!", "여기서 갈라지자", "나를 기억해줘(다음에 봐도 쏘지 마)", "교환하자. 필요한 거 있어?"와 같이 단순한 감정 표현과 전술적 커뮤니케이션 사이, 그 중간 지대에 놓여 있는 표현들입니다. 이런 '전술-감정 대화'의 레이어가 조금만 더 넓어져도, 유저는 음성 없이도 훨씬 다양한 협상과 제안을 시도해 볼 수 있습니다. 그 과정 자체가 이 게임만의 서사와 긴장을 만들어 줄 수도 있고요.


AC_EMOTEs.jpg 게임 안에서 여러 감정 표현들(EMOTES) / 출처: thegamers.com



UI/UX가 만드는 게임 문화, 아크레이더스


지금의 게임 문화는 인게임을 넘어, 디스코드, 오픈채팅, 커뮤니티 등 다양한 외부 채널까지 확장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장 강하게 기억하는 순간들은 여전히 게임 안에서 일어나는 장면들입니다. 인게임 채팅창에 올라온 한 줄, 전투 직전에 누군가가 찍은 핑, 휠에서 고른 단 한 마디의 이모트 같은 것들 말이죠.


그래서 저는 게임 안에서의 커뮤니케이션 경험을 설계하는 일은, 단순히 UI 요소를 하나 더 넣는 문제가 아니라, 그 게임이 어떤 문화를 갖게 될지, 플레이어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게 될지에 대한 방향을 정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Arc Raiders의 "Don’t shoot!"은 그런 점에서 꽤 상징적인 기능입니다. 이 한 마디는 신뢰와 배신, 긴장과 낭만이 교차하는 지점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고, 감정과 전략이 만나는 지점에서 UI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앞으로 더 많은 게임들이 '얼마나 강력한 도파민을 줄 것인가' 만큼이나 '얼마나 좋은 커뮤니케이션 경험을 제공할 것인가'를 함께 고민해 주었으면 합니다.


결국 한 판의 경험을 기억나게 만드는 건, 숫자로 남는 전적도, 화면을 가득 채운 이펙트도 아니고, 그 안에서 잠깐이나마 서로를 믿는 순간 혹은 철저하게 의심해 보는 그 묘한 순간들일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순간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생각보다 작은 휠 이모트라는 UI 요소 하나에서 시작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통제의 환상(Illusion of Contro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