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랙티브 게임 DISPATCH 플레이 후기
여느 때와 다름없이 스팀 상점을 둘러보던 중 DISPATCH라는 게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게임 관련 기사나 주변 사람들을 통해 딱히 들어본 적이 없는 게임이라 가볍게 스쳐 지나갔었는데, 연말 TGA(The Game Awards) 2025 인디게임 부문에 후보로 올라와 있던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GOTY에 오를 정도면 보통 게임은 아니겠다 싶어 곧바로 장바구니에 담았고 스팀 리뷰에 '압도적 긍정적'이라는 글자를 보고 망설임 없이 구매 버튼을 눌렀습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DISPATCH는 '콘텐츠를 담는 그릇'으로서의 게임은 무엇인지,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작품이었습니다.
게임 시작 전 트레일러를 봤을 때, DISPATCH는 게임보다는 오히려 '경험'에 가깝다는 인상이 들었습니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이 '게임다운 조작과 연출'로 몰입을 만들었다면, DISPATCH는 조작을 줄이고 대화와 리듬으로 밀어붙이는 작품처럼 보였습니다. 물론 플레이 중간중간 히어로를 배치(Dispatch) 시스템, 스토리 상의 해킹(퍼즐) 콘텐츠의 조작이 있긴 하지만, 메인 루프는 역시나 대화를 통한 인터랙티브한 전개가 핵심입니다. 전체적으로 게임답지 않은 부분이 많았지만, 그래서 더 신선한 게임이었습니다.
이 게임은 오히려 2018년 넷플릭스에 올라온 '블랙미러:밴더스내치'를 떠올리게 하였습니다. 실사가 아닌 '슈퍼 히어로물 애니메이션'으로 새롭게 승화된 작품처럼 느껴졌죠. 밴더스내치 보다는 훨씬 유머러스한, 복잡한 멀티엔딩을 고민하고 선택의 순간을 괴롭게 하는 방식이 아닌, 라이트한 버전의 애니메이션 시리즈를 보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사실 이 게임의 매력은 슈퍼히어로 장르의 일반적인 클리셰를 비틀어 보여주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강력하면서 정의롭고 빈틈을 찾아볼 수 없는 뻔한 영웅보다는, 평범한 칸막이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빌런과 영웅 경계의 B급 히어로들이 주요 인물들로 등장합니다. 이런 설정은 심리학에서 말하는 부조화 이론(Incongruity Theory)을 떠올리게 합니다. 기대(초월적 영웅)와 현실(평범한 직장)이 충돌하면서 생기는 긴장, 그리고 그 긴장이 풀릴 때의 쾌감이 스토리/연출 전반에 깔려 있어, 진지하지만 재미있는, 그 사이에서 묘하게 잔잔한 감동을 불러 일으킵니다.
https://youtu.be/LJt-4YgRAng?si=exNnySA8oXNA5z37
게임 개발 과정에서도 재미있는 비화가 있습니다. 이 게임을 개발한 애드혹 스튜디오(AdHoc Studio) 인터뷰에 따르면, 이 프로젝트는 원래 실사 기반의 '슈퍼 히어로 직장 코미디'로 기획되었다고 합니다. ESPN의 광고 시리즈 'This is SportsCenter'에서 영감을 받아, 슈퍼 히어로가 직장인처럼 일한다면 어떠할까?를 상상하며 이를 TV 시리즈로 풀어내려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개발 시작 시점 코로나19가 터지고 프로젝트가 중단될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애드혹 스튜디오는 과거 게임 개발 경험(Telltale Games 출신 멤버들로 구성)을 살려 '게임화'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히스토리 때문인지 게임은 총 8개의 에피소드로 흘러가고, 심지어 첫 출시 후 1주일마다 2개의 에피소드를 추가로 공개하는 전략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게임은 플레이한다기보다, 한 시즌짜리 애니메이션을 몰아보는 느낌에 더 가까웠습니다.
스토리 측면에서 DISPATCH가 신선한 이유는 기존의 슈퍼 히어로 장르를 우리에게 친숙한 형태로 가져왔다는 점에 있습니다. '더 보이즈(The Boys)'와 같이 냉소적이거나 잔혹하지 않으면서, 회사에서 짤리지 않기 위해 영웅일을 해야 하는 친숙함이 뭔가 더 가깝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플레이어는 영웅을 적재 적소에 배치하는 역할자(Dispatcher)로서 상황 판단과 관계 조율을 강요받게 되고 캐릭터에 강한 감정의 몰입감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https://youtu.be/jSw18LQUggw?si=pJiqAHqIPOSqA9ro
*다른 얘기인데, 이 게임의 주인공 로버트의 성우는 브레이킹 배드의 제시 핑크맨, 아론 폴(Aaron Paul)이 맡았습니다. 개인적으로 꽤나 적절한 캐스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결론적으로 DISPATCH는 전통적인 의미에서 '게임다운 게임'은 아닐 수 있습니다. 다만, 전체 스토리와 맥락, 주인공과 히어로들 간의 갈등, 전체 연출을 디지털 미디어로 담아내는데 있어, 인터랙티브 게임적 접근과 전개는 매우 신선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최근 즐겼던 다른 게임들보다 캐릭터/아바타적 관점에서 밀도 높은 경험을 할 수 있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한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2025년 TGA 인디게임 수상은 실패하였지만(클레르 옵스퀴르:33원정대의 수상으로 논란이 되는 부분), 수상 여부와 상관없이, 제게는 드라마와 게임의 경계에 있던 올 연말 가장 빛났던 경험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