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아직도 믿음을 쓰는가

— 《믿음의 자리엔, 사람이 있었다》 시리즈 1화

by 이한


“죄송합니다. 가진 게 이게 다라서요.”


2014년 2월, 서울 송파구의 한 반지하 방에서
어머니와 두 딸이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남긴 건 70만 원,

그리고 그 짧은 문장 한 줄이었다.


그 말이 내 가슴에 박혔다.
기도도, 찬송도, 말할 수 없었다.
그저 손끝이 얼어붙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그날 이후 처음으로
복음이 나에게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 믿음이 정말, 사람을 살리는 언어인가.

기도는 도대체 언제 응답하는가.
하나님은 그 방에 계셨던 건가.


교회는 찬송을 불렀고,
목사는 '기도하면 기적이 온다'고 말했고,
그 말이, 그날따라
너무 공허했다.


나는 25년 동안 대형학원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리고 2019년, 늦은 결심 끝에 내 학원을 열었다.
오롯이 내 이름, 내 책임으로 세운 공간이었다.


그런데,

3개월 뒤 팬데믹이 터졌다.

교실은 비었고, 수업은 끊겼고,

월세는 밀리고,
나는 매달 생존을 계산해야 했다.


그때의 나는
"주님"보다

"납부일"을 더 자주 불렀다.

그리고 그 말들이
어떤 찬송보다 현실적이었다.


누군가는 말했다.
“하나님은 계획이 있으셔.”
하지만 그 말은
계획을 세울 수 없는 이에게
때로는 잔인한 문장이 된다.


그 이후 나는 믿음을 묻기 시작했다.
기도는 왜 이렇게 느린가.
하나님은 왜 대답하지 않는가.
복음은 왜 고통 앞에서 침묵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믿음을 쓰고 있다.


왜냐고?


나는 하나님께 화가 나 있기 때문이다.

믿지 않는 자는 원망하지 않는다.
나는 실망했고, 상처받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하나님을 부르고 있다.


기도는 멈췄지만,
글은 남았다.


말이 믿음을 대신했고,

그 말들이 지금 나를 붙들고 있다.

내가 쓰는 믿음은
성공한 자들의 간증이 아니다.
고요한 예배당도 아니다.

나는
기도할 수 없던 자의 기록을 쓴다.

찬송보다 더 크게 들리는 신음,
그 신음의 자리에서
하나님이 계시지 않았던 그 빈 의자 앞에서
나는 아직도,
믿음을 쓰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한 줄을 남긴다.

혹시,
그날의 그 세 모녀처럼
말할 수조차 없었던 누군가에게
이 문장이 닿기를 바라며.


“믿음을 말하지만,
나는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 이한




이 글은 브런치에서의 첫 고백입니다.

앞으로도 질문하며, 견디며, 쓰겠습니다. — 이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