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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글샘 Jun 27. 2024

경청의 시간

타자의 추방-한병철

"올바른 교육이란 어떤 것인가. 예를 들면 체육 선생이 운동의 기초인 100m 경기가 중요하니까 100명 학생에게 '이제부터 100m 경기를 연습해서 한 달 후에 누가 상을 받는지 보자' 라고 했다. 1,2,3등은 상을 받고 97명은 인정받지 못했다면 선생의 잘못이다. 100명 학생에게 각자가 원하는 재능과 체질에 맞는 경기를 찾아 연습하라고 했다면 100명이, 100가지 경기를 택해 모두가 1등을 차지할 수 있다. 그 결과로 사회는 다양한 체육 선수를 키울 수 있다. "


보도자료에 실린 교육 뉴스를 보며 하루를 시작한다.  그 날은 중앙일보 '김형석의 100년 산책에 실린 <105세 교수가 고교 1학년 학생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가 눈에 띄었다. 김형석 교수의 고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황순원은 소설가가 되기를 원했고, 윤동주는 시인이 되기를 원했고, 김형석 교수는 철학을 공부해 교육계에서 정신적 지도자가 되겠다는 뜻을 세웠다고 한다. 


97명!

경쟁 구조 속에서 학교에서든 자본 주의 사회에서든 생겨나게 되는 숫자들! 

숫자들의 심리는 과연 어떨까?



두려움

오늘날의 두려움은 '자아는 타자를 기준으로 삼고, 더 이상 보조를 맞출 수 없다고 생각할 때,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게 된다. 타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내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한 표상이 이렇게 사회적 두려움이 된다. 개인들에게 부담을 주고, 개인들을 망가뜨리는 것은 객관적인 상황이 아니라 주요한 타인들과 비교할 때 뒤진다는 느낌'이다. 

많은 사람들이 실패와 좌절과 배척에 대한 두려움, 실수를 하거나 잘못된 결정을 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자신의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리라는 두려움 등 여러 가지 막연한 두려움에 고통 받고 있다. 이 두려움은 타인들과의 지속적인 비교로 인해 강화된다. 


소외

경쟁 사회 속에서 성과 주체인 우리가 자신을, 예컨대 자신의 몸을 최적화해야 할 기능적 객체로 지각하는 순간 이 주체는 자신으로부터 서서히 소외된다. 성과를 위한 자기 착취는 자기 소외로 드러난다. 스스로 원해서 했기 때문에 자기 소외는 스스로 잘 의식되지도 않는다. 거식증, 폭식증, 대식증 등은 심각해져가는 자기소외의 증상들이가. 결국 그렇게 우리는 자신의 몸을 더 이상 감지할 수 없게 된다. 


성과

경쟁 구조 속에서 나를 확인해주고 인정해주는 시선이 사라지고 있다. 요즘 교실을 들여다 보면 서로 목소리 높여 자신을 드러내기에 바쁘다. 인정을 갈구하며 아우성대지만 말하는 이만 있고, 듣는 이는 없다. 안 듣는다고 더 소리쳐 외칠 뿐이다. 조용히 하라고 더 크게 소리 지를 뿐이다. 전면적인 경쟁 구조 속에서 타인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도구화 하고 자신을 나르시시즘적으로 고립화하는 구조로 가고 있다. 이런 현상의 누적은 우울증으로 드러난다. 


타자를 경쟁의 대상이 아닌 구원의 대상으로 보기

우울한 자신은 타자로부터 완전히 격리되어 있다.  나를 우울에서 구원해주는 것은 타자다. 

자존감은 나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없다. 안정된 자아는 타인에 직면할 때 비로소 형성된다.  이를 위해 나는 나를 사랑하고 칭찬하고 인정하고 높이 평가해주는 타자를 필요로 한다. 안정된 자존감을 가기 위해 나는 내가 타인들에게 중요한 사람이며, 타인들이 나를 사랑한다는 표상을 필요로 한다. 이런 표상은 내가 불명료할지라도 내가 중요한 존재라는 느낌을 갖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하다.


타자를 위한 경청의 자세

오늘날 의도적으로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자기 착취가 비대해져 있다. 그래서, 타자에 대한 관계부터 새롭게 보고 타자를 경청하며 타자에게 대답하는 책임 있는 언어를 다시 배워야 한다. 무엇보다도 점점 더 에고에 집중하는 것, 사회가 나르시시즘에 빠지는 것이 경청을 더욱 어렵게 한다. 

경청은 우선 나와 다른 타자를 환영해야 하며 다름을 긍정해야 가능하다. 경청의 태도는 인내로 표현된다. 이런 태도는 스스로 만족하는 에고를 막아주고, 에고가 보류된 타자와의 공명의 공간으로 안내한다. 


미하엘 엔데의 '모모'에서 우리는 '경청'이 무엇인지 읽어낼 수 있다. 

'모모가 넉넉히 갖고 있는 것은 시간뿐이었다.'

모모의 특징은 시간이 많다는 것이다. 이 시간은 타자를 위한 시간이다. 다른 사람들을 경청함으로써 그들에게 주는 시간이다. 그저 거기에 앉아 들을 뿐인데도 모모의 경청은 기적을 낳는다. 모모는 사람들이 혼자서는 결코 떠올릴 수 없었던 생각들을 하게 만든다. 



경제의 논리에 따라 성과와 효율성을 따지고, 가속화 압박을 낳는 사회에서 타자의 시간은 비생산적인 시간일 뿐이다. 하지만, 이런 생산성이 우리를 성과의 주체인 기계처럼 보게 하고 실패와 성공만이 존재하는 사회를 만든다. 그 속에서 소수와 성공하는 자와 다수의 실패자를 만들고, 수많은 이들이 두려움과 소외 속에 외롭다고 아우성대고 있다. 우리를 고립화하고 개별화하는 자기 시간과는 반대로 경청의 시간, 타자를 위한 시간은 공동체를 만들어 낸다. 그러므로 타자의 시간은 좋은 시간이다. 타자를 다르게 보는 눈만이 우리를 우울에서 빠져 나오게 할 것이다.


"거르고 걸렀더니 내가 걸러지더라."

이건 유퀴즈에 나온 과고 출신의 학생이 한 말이다.

한병철의 '타자의 추방'을 읽으며 학교에서 패배감을 겪는 다수의 학생들을 떠올려 보았다. 성적이라는 면에서만 보면 1등만이 있는 패배사회가 된다. 이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라 어쩔 수 없이 1차적으로 1등이 느끼는 성공감과 1등이 안된 패배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영원한 승리자는 없다. 기나긴 인생을 볼 때, 우리는 사회가 만들어낸 시스템 속에서 갇히지 않는 관점을 가질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할 것이다. 나와 함께 있는 다른 사람을 '경쟁의 대상'이 '소외와 고립'에서 빠져나올 '구원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을 배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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