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더'가 중요할까
정말 사랑의 무게가 우리를 힘들게 하는 걸까요? 아니면, 저울을 바라보는 우리 마음의 시선 어딘가에 다른 이유가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요.
지수의 하루는 남자친구 현우의 SNS ‘마지막 접속 시간’을 확인하며 시작되고 끝났다. 새벽 2시 17분. “피곤해서 먼저 잘게.” 그가 메시지를 보낸 시간은 밤 11시였다. 비어버린 세 시간 동안 그는 무엇을 한 걸까. 자신과의 통화는 5분 만에 끊어놓고서.
지수는 불안한 손가락으로 그와의 대화창을 하염없이 올렸다. 몇 달 전, 현우가 보낸 장문의 메시지들이 화면을 채웠다. ‘오늘 지수 생각하면서 일했더니 하나도 안 힘들었어.’, ‘네 목소리 들으니까 살겠다.’ 온갖 이모티콘과 사랑이 뚝뚝 묻어나는 문장들. 그에 비해 지금은 어떤가. ‘ㅇㅇ’, ‘나중에 연락할게’, ‘피곤하다’. 단답형의 문장들은 마치 사랑이 닳아 없어진 흔적처럼 보였다.
문득 2년 전, 그들의 시작이 떠올랐다. 작은 북카페에서 우연히 같은 책을 집어 들었던 날. 어색함도 잠시, 몇 시간을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떠들었다. 책 이야기, 영화 이야기, 별 볼 일 없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까지. 그의 모든 것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좋았고, 나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었다. 그때는 저울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다. 그저 서로를 향한 마음만이 가득했다.
“지수 씨, 그렇게 들여다보면 없던 문제도 생기겠다. 연애하는 게 아니라 꼭 미제사건 담당하는 형사님 같아.”
다음 날, 멍한 얼굴로 출근한 지수의 책상 위로 선배인 미연이 커피를 내려놓으며 남자친구의 SNS를 보고 있는 나에게 웃으며 말했다. 뼈 있는 농담에 지수는 멋쩍게 웃으며 핸드폰을 뒤집었다. 그 말이 그녀의 가슴에 작은 가시처럼 박혔지만, 무시했다.
최근 현우의 회사에 큰 프로젝트가 시작되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약속은 번번이 취소되었고, 통화는 짧아졌다. 지수의 수사는 더욱 집요해졌다. 그의 SNS 친구들의 게시물을 뒤지며 혹시 회식이 있었는지 확인했고, 그가 남긴 ‘좋아요’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했다. ‘나한테 연락할 시간은 없어도, 다른 사람 게시물 볼 시간은 있구나.’ 사랑의 저울은 속절없이 그녀 쪽으로 기울었고, 그 무게만큼 억울함과 서운함이 심장을 짓눌렀다.
그날 밤, 그녀는 쌓였던 감정이 터져버렸다.
“오빠. 오빠는 변했어. 나만 이 관계에 애쓰는 거, 이제 너무 지쳐.”
수화기 너머 현우의 목소리에는 사랑이 아닌 깊은 피로가 묻어났다. “지수야, 나 정말 정신없어서 그래. 왜 그렇게 나를 못 믿어?”
“못 믿는 게 아니잖아! 사실을 말하는 거지. 예전의 오빠는 안 그랬어. 오빠는 일만큼 우리 관계가 중요하지 않은 거잖아.”
냉랭한 침묵 끝에 돌아온 건 사과가 아닌 긴 한숨이었다. “그렇게밖에 생각이 안 된다면, 나도 더 할 말 없다.” 전화가 끊겼다. 역시 그랬다. 더 사랑하는 쪽이 상처받고, 아쉬운 쪽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는 이 불공평한 게임. 지수는 이 게임의 영원한 패자였다.
어둡고 차가운 자신의 방 안에 홀로 남은 지수는 억울함과 서러움에 몸을 떨었다. 모든 게 현우 탓인 것만 같았다. 한참을 울다 지쳐 멍하니 천장을 바라볼 때였다. 불현듯, 며칠 전 미연 선배가 던졌던 농담이 귓가에 울렸다.
‘꼭 형사님 같아.’
그 말이 닫혀있던 생각의 벽에 균열을 냈다. 그리고 그 균열 틈으로 2년 전, 북카페에서의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새어 나왔다. 그때의 나는 그의 말을 분석하지 않았고, 그의 행동에 점수를 매기지 않았다. 그냥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좋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의 모든 언행을 증거물처럼 수집하며 그의 사랑을 의심하는 ‘형사’.
‘나는 언제부터 사랑을 하는 대신, 사랑을 증명받으려고만 했을까.’
그 순간, 지수는 깨달았다. 자신을 힘들게 한 것은 현우의 식어버린 사랑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의 사랑을 끊임없이 확인하고 증명받아야만 겨우 안심하는, 저울 위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자신의 불안한 시선이었음을. 관계를 망친 건 그의 변심이 아니라, 사랑을 수사 대상으로 만들어버린 자기 자신이었음을.
‘띠링-’
그때,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현우였다.
'지수야, 자?'
평소 같았으면 이 한 줄을 놓고 수십 가지 경우의 수를 따졌을 것이다. 사과가 없는 걸 보니 아직 화가 났나. 이 시간에 왜 보냈을까. 하지만 이번에 지수는, 잠시 메시지를 바라보다, 조용히 핸드폰을 책상 위에 뒤집어 놓았다. 그리고 책장으로 걸어갔다. 2년 전, 현우와 처음 만났던 날 함께 이야기했던 책. 그가 선물해 주었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펼쳐보지 못했던 그 책을 꺼내 들었다.
첫 장을 넘기는 순간의 손길은, 오랜만에 설렜던 과거로 돌아간 것 같았다. 그 기분은 저울에서 내려와, 처음으로 땅에 두 발을 딛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피었다.
이야기 속 지수처럼, 우리 역시 사랑의 저울 위에서 위태로운 줄타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내가 준 마음만큼 돌려받지 못할까 봐, 내 사랑이 더 커서 약점이 될까 봐 노심초사하면서 말이죠.
어쩌면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누가 더 사랑하는가’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내 행복의 기준점이 상대방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놓여있는지, 아니면 변치 않는 내 마음 안쪽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는지.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내 삶의 주도권을 나도 모르게 상대에게 모두 넘겨주고 있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