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박한 삶에서 배운 단단한 의지에 대하여
시기는 장마였다.
눅눅한 습도로 인해 거실 바닥도 방바닥도 끈적끈적했다.
계절도 날씨도 내 마음을 아는 듯 눅눅하고 끈끈했다.
'역사는 인간을 현명하게 하고,
시는 지혜롭게 하고,
수학은 치밀하게 하고,
철학은 심원하게 하고.
윤리학은 중후하게 하고.
논리학과 수리학은 담론에 능하게 한다.
따라서 학문은 인격이 된다.'
ㅡ프랜시스 베이컨ㅡ
이 글이 눈을 멈추게 한다.
'철학은 심원하게 한다'
이 글귀에서 눈이 떼어지질 않는다.
'생각을 심오하게 하는 학문이 바로 철학이구나.'
내 삶을 잠시 돌아보았다.
조금 더 심원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과연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가!
얕은 지식으로 장님이 코끼리 다리 만지듯이 살아온 게 내 삶의 방식이 아니던가.
이미 내 나이는 50대 중반,
앞자리 6을 향해 가고 있는데 현실의 나는 무주택자.
공부를 해야만 하는 이유를 온몸으로 절감했다.
때마침 평택의 어느 부동산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좋은 물건이 있으니 한 번 보라고.
장마로 비가 오락가락하는 날이었다.
나갈 준비를 마치고 창 밖을 보니,
어느덧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장대 같은 비인들 나의 바람을 꺾을 수 있으랴.
그깟 비 따위에 내 초라한 현실을 타협할 순 없었다.
차를 몰고 오산에 다다랐을 무렵,
어느새 장대 같은 비는 폭우로 변했고,
마치 바닷속을 달리는 듯 앞이 하얗게 흐려졌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었다.
악천후라 해서 내 의지가 꺾일 리없다.
그 어떤 장애물도 난관도 폭풍우도 내 앞길을 막을 순 없었다.
인간의 초인적 힘은 극한의 어려운 상태에 발휘된다 했던가.
미국 소설가 아서 골든이 말했다.
"역경은 세찬 바람과 같다.
역경은 찢어질 수 없는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을 우리들로부터 빼앗아 가 버린다.
그 결과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가를 알아차리게 된다."
나는 50대 중반의,
내 몸 하나 편히 누울 수 없는 무주택자.
집주인이 나가라면 어쩔 도리 없이 이사해야 하는 삶.
이곳저곳을 2년에 한 번씩 옮겨 다니며
살아야 하는 인생이 나의 현실이 되었다.
머리는 한 달에 한 번씩 염색하지 않으면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다.
이미 폐경을 지나 노년의 문턱에 들어선 나에게,
이런 시련과 역경은
모든 것을 빼앗아간 것과 다름없었다.
그깟 장대비가 나를 막을 순 없었다.
게릴라성 폭우가 나를 막을 순 없었다.
그런 절박한 상황에 놓인 사람은
더 이상 후퇴도 철회도 포기도 없다.
그게 바로 내가 처한 상황였다.
임장을 마치고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
찻집에 들어가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차를 마시며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 지금 평택이야.”
친구는 소리쳤다.
"너 미친 거 아니야?
지금 물난리가 나서 온 방송국이 비 피해로 들썩들썩인데 제정신이야?"
나는 조용히 웃었다.
내가 이런 사람이다.
극한에 몰리면 못 할 게 없는.
나는 불굴의 의지를 가진 에너자이저!!
그리고 아서 골든은 그것을 일깨워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