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오래전 설날의 풍속화
내일 모래면 설날이다.
집 앞에서 700m쯤 저쪽 남북으로 벋은 서해안 고속도로에 부쩍 교통량이 늘었다. 아들 녀석은 때마침 해외 출장 중이고, 딸아이 더러는 고생스러우니 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래도 고속도로를 메운 자동차 행렬을 보니 접어둔 그리움이 밀려온다. 느리게 움직이는 저 차에 탄 사람들도 살기 바빠 미루고 쌓아두었던 그리움을 치유할 곳을 찾아가는 중이리라. 그리고 돌아갈 때는 세상을 향해 걸어갈 힘도 함께 얻어 가리라.
내가 열 살쯤 되었을 무렵의 어느 설날이었다. 지난가을에 이사 와서 처음 맞는 설날이었다. 작은 집에서 살다가 안마당과 타작마당이 갖추어 있고, 비록 초가집이지만 위채, 아래채, 그리고 헛간과 곳간으로 쓰이는 행랑채까지 갖추어진 집으로 이사를 한 것이다. 아버지는 집 앞에 열두어 마지기쯤 되는 옥답도 새로 장만하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어머니는 당신의 빛바랜 한복을 잘라서 내 설빔을 지어주곤 하셨데, 그 해는 새 옷감을 끊어다가 햇솜을 넣어 옷을 지어주셨다. 아마 꽃분홍 치마에 노랑 저고리였을 게다.
곱게 차려입고 서둘러 차례를 지냈다. 이웃에서 삭망제 올리는 곡소리가 나기 전에 차례를 올려야 한다고 서두르신 것이다. 평소에는 구경도 못해 본 음식들로 배를 채운 우리 삼 남매는 부모님께 세배를 올리고 덕담도 들었다.
"여자는 설날 아침에 남의 집에 가는 거 아니다."
아침 밥상머리에서 어머니가 타이른 말씀이지만 열 살짜리 계집애는 설빔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길 건너 점순이네 집으로 쪼르르 달려가서 점순이를 불렀다. 사립문도 없는 점순이네는 아직 차례를 지내지 않은 모양이었다. 부엌에서 음식 그릇을 나르던 점순이 어머니가 내다보았다. 그때 점순이 어머니는 만삭이었다. 점순이는 다섯째 딸이고, 그 어머니는 일곱 번째 아이를 가졌다.
설날 아침에 처음 찾아오는 사람이 남자면 아들을 낳고, 여자면 딸을 낳는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너 때문에 그 집 또 딸 낳으면 어쩐다냐?'"
그럴까 봐 미리 타이른 것이라 하시며 어머니는 몹시 꾸중하셨다. 나 때문이었는지 점순이 어머니는 한 달도 채 안 되어 딸을 낳으셨고, 그 후로도 딸을 하나 더 낳으셨다.
아침 댓바람부터 꾸중을 들었으나 아버지 따라 큰집에 세배하러 가는 나의 발걸음은 날아갈 듯이 가벼웠다. 큰집은 아버지 큰 당숙 되는 어른댁인데, 문중의 큰 어른이셨다.
큰 집은 집도 무척 크고 마당도 넓었다. 수염이 긴 큰할아버지는 옛날에 서당 선생님이셨다는데 병환이 깊으셔서 보료 위에 눕거나 앉아계셨다. 큰 집에는 할머니 두 분이 계셨다. 키가 크고 천천히 걸으시며 늘 웃는 얼굴이지만 별로 말씀이 없으신 큰할머니와, 대를 이을 손을 보려고 큰할머니 당신이 손수 골라 들이셨다는 작은 큰할머니가 계셨다. 소원대로 작은 큰할머니는 아들 사형제를 낳으셨다. 작은 큰할머니는 키가 자그마하고 살집이 있고 늘 안팎으로 종종걸음을 치셨다.
나붓이 큰절을 올리고 인사 말씀까지 올리니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함박웃음을 웃으며 칭찬하셨다.
"고 녀석 언변이 좋아서 크게 되겄어!"
유과며 강정은 달고 맛있었다. 유과 바탕에 조청을 바르고 찰벼, 수수, 조 따위를 튀겨 옷을 입힌 유과는 큰 할아버지 댁에 와야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이었다. 다 큰 종숙들은 '삼촌, 삼촌'하며 꽃분홍 치맛자락을 나풀거리며 쫓아다니는 나를 유독 귀여워해 주셨다.
아버지를 따라 집안 어른들을 차례로 찾아뵙고 세배를 올렸다. 여자는 설날 아침 일찍 나다니면 안 된다는 말 따위는 까맣게 잊은 나는 맛있는 음식과 칭찬과 덕담에 최고의 설날을 보냈다. 그때는 친척들이 한마을에 모여 살아 참 좋았는데…. 그때의 친척들은 지금 어디에서 살고 계실까?
전화벨 소리에 놀라 수화기를 들었다. 큰아들놈이다. 미국도 마침 주말과 기념일이 겹쳐서 설이 연휴가 되었다고 한다. 지금 여행 중이라며 새해 복 많이 받으시란다.
오늘은 모든 것이 그리워지는 세밑이다. (2010. 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