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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 Mar 07. 2023

Favorite Things_01. 미스 리틀 선샤인


3월, 첫 주말에 친정집엘 갔다. 집에서 빈둥대고 있는 내게, 아빠가 이번에는 약속 잡지 않았느냐고 물으셨다. 응, 아무것도. 해가 중천에 떠 있어도 나는 누워있었다. 숨만 뻐끔 쉬었다. 무료해질 때쯤, 손을 뻗어서 스마트폰을 그러쥐었다. 핸드폰에 담아놓았던 사진을 보았다. 쭉 훑어보다가 영화 캡처 사진을 보았다. “미스 리틀 선샤인”에 나온 장면이었다. 나의 엄지손가락이 멈췄다. 그래, 오늘은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 갑자기 손발이 바빠졌다. 엄마는 내게 이미 본 영화를 굳이 돈까지 줘가며 보냐고 핀잔을 주셨다. 그래도 봐야겠어, 오늘따라 햇볕이 따사로운 탓이야.




영화가 나열하는 등장인물부터 범상치 않다.

마약을 복용해서 요양원에서 쫓겨난 할아버지,

성공학 강의를 하지만 벌이는 변변찮은 아빠 리처드,

항공 학교에 가기 위해서 9개월째 묵언 수행 중인 오빠 드웨인,

미인과는 거리가 있는 외관을 지녔지만, 미녀가 되고 싶은 일곱 살 소녀 올리브,

사랑과 일자리를 잃은 뒤 자살 시도를 하고야 만 삼촌 프랭크,

이 모든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엄마 쉐릴까지.


프랭크 삼촌이 회복을 완전히 마치지 못한 채로 병원에서 퇴원한다. 엄마 쉐릴은 동생을 데리고 집으로 간다. 가족이 모두 모였다. 식은 치킨으로 식사를 하는 사람들. 별안간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쉐릴은 올리브가 미인대회 본선에 출전할 수 있게 됐다는 전화를 받는다. 어떻게 가야 한담. 어느 누구 하나를 놔두고 가기엔 매우 불안하다. 비행기로 가기엔 경제적으로 빠듯한 상황. 결국 온 가족이 낡은 폭스바겐 트랜스포터에 몸을 싣는다. 아주 당연하게도 이들이 단숨에 캘리포니아로 갈 리가 만무하다. 트랜스포터는 기어가 고장 나 버린다. 차를 언덕진 데에 주차하거나, 온 가족이 차를 밀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퍼져버린 것이 차뿐이었겠는가.

아빠는 고대했던 출판 계획이 무산됐다.

할아버지는 여행 도중에 갑작스레 숨을 거두셨다.

오빠는 공군사관학교 입학의 꿈과 침묵의 맹세가 물거품이 돼버렸다.


불행이 켜켜이 쌓인 이 가족, 과연 무사히 캘리포니아에 도착할 수 있을까?

올리브는 과연 대회에 참가할 수 있을까?

할아버지에게 배웠다는 히든카드는 도대체 무엇일까?




영화는 언제 봐도 참, 정신 사납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시종일관 내달리고 소리 지른다.(심지어 트랜스포터까지 클락션을 울린다!) 그럼에도 영화를 다 보고 나면, 그들이 참 사랑스럽다.

그들의 모습에서 나의 찌질한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그들이 던지는 응원의 말과 행동이 내게 파도처럼 밀려와 위로가 되기도 한다.

특히 이번엔 드웨인의 말이 참 인상적이었다. 나에게 정신 차리고 좋아하는 거 빨리 시작하라는 것 같았다.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는 직장 경쟁까지.
망할 공군 사관학교에도 갈 필요 없어.
비행하고 싶다면 다른 방법도 있으니까.
남들이 열나 뭐라든 좋아하는 걸 하면 돼.



최근에 기대했던 일이 성사되지 않았다. 새해가 되고 나서부터 계속 갈망했던 일이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동안 무기력에 빠졌다. 글도 쓰지 않았다. 책도 읽지 않았다. 일기 쓰기도 미루고 잠만 잤다. 봄이 다가오는 판에 참으로 늦은 동면을 취한 셈이다. 그래도 그 시간 덕분에 나는 일어날 수 있었다. 영화를 놓쳤을지도 몰라.


나를 진정으로 깨운 것은 휴대폰에 저장해 두었던 사진 한 장. 프랭크 삼촌이 해준 말이었다.

그의 말대로 아니, 프루스트의 말대로 오늘의 힘겨움들이 훗날 가장 좋았던 시기로 기억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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