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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 Dec 20. 2022

청변풍경(廳邊風景)_03. 5월의 주인공

5월 어느 맑은 날이었다.

베이지색 점퍼를 입고, 머리에는 레이스가 둘린 여성용 밀짚모자를 쓰신 할아버지가 휘적이며 나타나셨다. 그 뒤로 빨간색 상의를 입고 지팡이를 짚으신 할머니가 꼬부랑 자세로 천천히 걸어오셨다. 할머니의 여권을 만들러 오신 거였다. 할아버지는 날쌘 등장과는 달리 느긋하고 끈덕지게 할머니의 신청서 작성을 도우셨다.


잠시 후, 접수대에 앉으신 할머니를 마주했다. 안타깝게도 바로 접수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 사진이 여권 접수 조건에 부합하지 않았다.

  "어르신, 사진을 다시 찍어 오셔야 할 것 같아요. 얼굴의 길이가 규정보다 작아요."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근처에 사진관이 있는지 확인하시고는, 오셨던 대로 할아버지가 앞장서서 가셨다.




얼마나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할아버지만 청사 안으로 들어오셨다. 여전히 휘적휘적하시며.

  "어르신, 어머님은 어디 계세요?"

  "너무 더워서 내가 사진관에서 쉬고 있으라 했어."

  "어르신, 저희가 할머님의 안면과 지문으로 신청자 본인을 확인해야 해요. 직접 오셔야지 접수하실 수 있어요."

할아버지는 직접 와야 하는 거냐며 재차 확인하시고는 다시 발걸음을 돌리셨다.     


또 다소간의 시간이 지난 후, 할아버지의 세 번째 입장, 할머니의 두 번째 입장.

서류도 완성됐고 사진도 규정에 맞아 무사히 나머지 업무를 진행할 수 있었다. 한창 접수 업무를 보고 있는데, 재치 넘치는 선배가 할아버지께 장난기 섞인 질문을 했다.

  "어르신, 밀짚모자 이거 어머님 것 아니에요? 어머님 거 뺏어 쓰신 거죠?!"

  "아냐, 마누라가 안 써서 내가 쓰는 거야."

할아버지는 손사래까지 치셨다. 절대 아니란다. 당신의 모자가 된 지도 벌써 4년이나 되었다고. 실례가 될지 모르겠으나, 할아버지가 너무 귀여우셨다. 마스크에 뒤 편에 숨어 함박웃음을 지었다. 흐뭇한 마음으로 할머니의 여권 접수를 마쳤다.

       



접수가 시작되기 전부터 끝이 날 때까지, 할아버지의 말씀과 태도에는 다정함이 넘쳐흘렀다.

아내의 일임에도 당신의 일인 양 앞장서 걸었다.

아내의 신청서를 당신의 것처럼 세심히 보았다.

아내의 거동이 불편하니 당신이 신청하고 오겠다며, 아내를 사진관에 쉬도록 두고 당신 홀로 왔다.

마지막엔 아내의 여권을 당신이 대리 수령하겠다고 자처했다.

거기에 화룡점정으로 아내가 쓰지 않으니 나라도 써야겠다며 푹 눌러쓴 레이스 밀짚모자까지.

할아버지의 모든 행동이 사랑이었다.


나는 지금껏 5월은 온전히 이제 막 결혼을 앞둔 커플이나 신혼부부의 것으로 알았다. 우리 부부에게도 이제 5월 같은 젊음은 사라졌겠다고 여겼다. 그날 할아버지의 다정을 접하고 생각이 바뀌었다. 부부는 늙어가겠지만, 부부간 애정은 그리 싱그러울 수도 있겠다고. 우리 부부도 그리 늙어갈 수 있다면 좋겠다고.


5월이 되면, 떠올릴 것이 하나 늘었다.


덧, 위임장 작성을 미리 안내해 드리면서 알게 된 놀라운 사실, 할아버지가 두 살이나 연하였다. 

연하가 진리인 걸까, 이번 생은 망한 것일까, 하고 몰래 탄식했다.



<토막 여권 정보>-


1. 여권 사진

여권 발급 신청일 전 6개월 이내에 촬영된 사진만 가능해요!

여권용 사진 규격 :가로 3.5cm X 세로 4.5cm

머리 길이: 정수리(머리카락을 제외한 머리 최상부)~턱 3.2~3.6cm 사이여야 합니다!


2. 대리수령

신청인의 신분증(사본)

대리인의 신분증

위임장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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