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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omad Mar 10. 2023

03. 풋사랑, 그 애.


사랑을 시작할 때, 네가 얼마나 예쁜지 모르지
–윤종신, 좋니

나는 이 노랫말을 너무나 좋아한다.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이 얼마나 예쁜지 알기 때문이다. 몇 해 전 그런 친구의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그의 모습이 절로 해사해지더라. 눈동자는 또 어찌나 반짝이던지 내 눈이 부셨다. 나도 저런 모습을 지녔었을까.




내 풋사랑은 고등학교 2학년 때 전학을 왔다. 2학기 늦가을 무렵이었다. 두부처럼 뽀얗고 동글동글한 얼굴, 짙은 쌍꺼풀, 밤톨같이 짧은 머리의 남자애.

나는 그 애랑 어떻게 친해졌을까.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친해지고 나서의 기억만 있다.

하교하고 나면, 나는 그 애와 함께 독서실을 갔다. 각자 공부를 하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밤늦은 시간이면 사장님이 태워 주시는 봉고차를 타고 그 애와 수다를 떨었다. 그뿐인가. 서로의 눈에 서로가 보이지 않을 때면 메일을 보냈다. 휴대폰 문자로도 연락할 수 있었지만 우리는 굳이 메일을 썼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시시껄렁한 내용뿐이다. 오늘 무엇을 했는지, 무엇을 먹었는지 등의 참으로 사소한 내용.


그런 유치한 메일 말미에는 항상,

-답장해라, 내가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라고 적어 보냈다. 그러고는 우리는 다음 답장을 보냈다.


3학년으로 넘어가는 그 겨울은 따뜻했다. 그 애를 볼 때마다, 나는 발그스레한 볼을 내보이며 수줍게 인사를 했다. 난 얼굴에 모든 게 드러나는 사람이다. 지금 생각해도 얼굴이 화끈하다. 내 마음이 얼마나 다 보였을까. 그런데도 그 애는 능글맞게도 내 인사를 잘 받아주었다. 지금도 그 애가 지나가고 나서 친구랑 호들갑 떨던 게 생각이 난다.


본격적으로 3학년이 되고 나서의 기억은 거의 없다. 어쩐지 그 애와 연락하고 지냈던 겨울보다도 더 추웠다. 그 애와 나는 옆 반으로 갈라졌다. 다니던 독서실도 끊었다. 그 애와의 접점은 점차 사라졌다. 매미가 구애의 노래를 한창 부를 무렵에, 나는 대학 수시에 합격했다. 이분법이 그득했던 교실에서, 나는 고립되었다. 아직은 수험생이었던 친구들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하물며 그 애랑은 어떠했겠는가. 우리는 완전한 타인이 돼버렸다.


시간은 용케 흘렀다. 여름에서 가을로, 가을에서 겨울로. 친구들이 하나둘 대학에 붙었다. 남은 친구들은 수능을 치렀다. 모두 노는 시간이 늘었다. 졸업 여행을 다녀왔다. 서로의 새로운 세상으로의 발돋움을 응원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끝내 그 애와의 관계는 회복되지 않았다. 풋내 나는 나의 사랑은 졸업과 함께 끝이 났다.




어느덧 다시 봄이다. 바람이 살근하게 불어온다. 봄내음에 취해서 몇 자 끄적여본다. 쓰는 김에, 그 애에게 감사를 전하며 다시 안녕을 고하련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지금까지 글쓰기를 즐기게 된 데에는 어쩌면 그 애의 응원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답장을 꼭 쓰라는 말.

친구야, 나는 그 어떤 말보다도 너의 그 말이 가장 설렜었어.

내가 너와 다음을 기약할 수 있어서 기뻤어.


친구야, 고마워. 진심으로 너의 행복을 빈다. 행복하게 지내렴.


덧,

그 애의 메일 계정 닉네임은 '스네이크'였다.

문득 단어를 검색해보고 싶어서 검색해 봤더니, 체육 용어 중에 이런 의미가 있었다.

"양궁에서, 과녁을 벗어나 깊은 잔디 속으로 들어가 잃어버린 화살."


너는 정말 내 추억의 잔디밭 속으로 들어가 버린 화살이 되어버렸구나.

신기하게도 그것이 썩 나쁘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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