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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노 Sep 06. 2023

사랑을 시간에 비유하자면

 누군가 내게 살아가며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사랑’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사회적 동물인 우리는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감정을 형성하고, 이를 토대로 성장해 나간다. 누군가에게는 기쁨의 감정을, 누군가에게는 원망과 슬픔의 감정을. 그러한 내면의 변화를 느끼며, 우리는 진정으로 성숙해지고 비로소 ‘사람’이자 ‘인간’이 되는 것은 아닐까. 나를 포함한 누군가가 살아가는 이유는 사랑을 받고자, 사랑을 받았기에, 그 사랑을 갈구하고자 살아갈 테지. 누군가는 미움받기 싫고, 원망 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자신을 숨기거나 개선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사람의 이러한 행태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타인으로부터 얻게 되는 愛, 즉 애정으로부터 귀결된다. 이 글을 쓰는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사랑을 받기 위해. 나아가 진정으로 행복해지기 위함이다.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감정이라고 생각되는 호감. 즉, 애정과 사랑은 우리의 행복에 가장 가까운 것이다. 우리는 행복하기 위해 사는 것이지 살기 때문에 행복해지려 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게 삶을 살 수는 없겠지만, 최대한 많은 이들이 행복해지길 바라는 나의 마음. 이 정서의 흐름이 ‘사랑’을 시작으로 ‘행복’이라는 최후 목표에 도달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가 더 많은 사랑을 받고, 더 많은 애정을 흡수하여 진정으로 성숙해지고 비로소 ‘사람’이자 ‘인간’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필자는 사랑의 감정, 즉 애정이 순환과 굴레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단순하게 좋다, 즐겁다, 기쁘다는 감정이 아닌, 살아가는 원동력이 되고 나보다 더 누군가를 위하는 마음. 그것을 시작으로 하여 나아가는 감정의 성장과 진화. 사람에 따라 다르게, 그리고 상황에 따라 다르게 퍼져가는 무형의 흐름을 우리는 바로잡기 위해 알아보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순환의 흐름을 조금 쉽게 서술하고자 사랑을 ‘시간’에 비유하고자 한다. 사랑을 시간에 비유하자면 다음과 같다. 낮은 이기적 사랑, 저녁은 위험한 사랑, 늦은 밤은 헌신적인 사랑, 여명이 떠오르는 새벽은 고달픈 사랑이다. 사랑을 많이 경험하였는가?라는 질문에 자신 있게 ‘그렇다’라고 대답하기는 어려울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만, 사랑의 총량이 아닌 교류에 경험에 대한 빈도를 물어본다면, 나의 대답은 당연히 ‘그러하다’이다. 받거나 주기만 하는 일방향적 사랑이 아닌, 비언어적 소통으로 일궈낸 감정의 교환은 지금의 나를 따듯하고 다정하게 만들어주었기에 지금처럼 사랑에 대한 나의 진솔한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것이다.
 낮의 사랑은 왜 이기적인가? 태양이 빛을 내뿜어 주변을 오로지 자신의 빛으로 삼켜버리는 것. 이것이 바로 낮의 대표적 특성이다. 새까만 먹구름 혹은 화가 잔뜩 폭우가 하늘을 덮쳐도 저 밝은 태양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한번 고개를 내밀기 마련이다. 낮이란 그러한 태양이 주변으로부터 사랑을 독차지하는, 주목받기 위한 사랑이다. 타인보다는 본인을 우선하여, 최대한 많은 애정을 갈구하는 어린 사랑이기에, 이는 이기적인 애정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누군가는 ‘오히려 빛을 주변에 전파하기에 이타적인 사랑이 아닌가?’라고 의문을 품을 수 있다. 그러나, 화자의 의견은 다소 상이 하다. 주변이 어두워야 태양빛은 더 환하게 타오르는 법. 낮을 더 밝고 노란빛으로 물들이기 위해서는 그만한 주변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강한 빛으로 주변을 쉽사리 집어삼킬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환하게 타오르고자 하는 태양은 미성숙하고 어린 사랑을 하는 것이다. 모든 애정이 자신에게 귀속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빛으로 드러난 이기적인 사랑 후에는 필연적으로 위험이 찾아오게 된다.
 노을이 지는 그 타이밍, 저녁은 위험하고 위태로운 사랑이다. 밤하늘이 뜨기 전, 낮게 깔리며 사라지는 태양빛과 같이 이제는 어둠이 태양빛을 삼키고자 한다. 모든 이들이 그렇겠지만, 받아주기만 하는 행위는 늘 지치기 마련이다. 너무나도 강렬한 빛과 열에 주변의 마음이 녹아버린 탓이겠지. 이제는 낮의 지독하고 이기적인 사랑이 끝나갈 시간이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사랑을 전해주고, 이제는 공허하여 검게 물든 어둠이 자신이 지불한 사랑의 대가를 갈망한다. 어둠과 태양이 공존하며, 서로 피를 튀기며 싸우는 현실.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서로에게 거침없는 칼날을 휘두르는 아찔한 상황에 받는 내면의 상처는 노을이 된다. 이기적인 이유는 여리기 때문이다. 어리고 여리기에 상처 입는 것을 두려워하고, 모두에게 인정과 애정을 받고자 하는 것. 그렇기에 낮이 받은 상처는 더욱 큰 아픔이 되어 자신의 주홍빛 혈흔으로 온 하늘을 기분 좋은 석양의 색으로 물들이는 것이다. 어찌 보면 둘 간의 간격이 가장 가깝고 평등하게 보이기에 공평한 사랑으로 치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상은 낮과 밤중 우위를 누가 점하느냐의 싸움으로 여겨질 수 있기에 한쪽이 반드시 삼켜지기 마련이다. 저녁은 그 좁은 사이 간격에서 줄다리기하는 위험한 사랑이다.
 이윽고 해가 지고 어둠이 찾아오는 늦은 밤이 되면 헌신적인 사랑이 된다. 그전의 태양이 주목받고자 했던 이기적인 사랑, 착취의 행동을 잠시 멈추고 오로지 주변의 빛을 발하기 위해 자신을 숨기는 것이다. 어둠은 참 아이러니하다. 사랑을 주기만 한 그것은 자신이 사랑받을 위치에 되어서도 애정을 갈구하지 못한다. 늘 주기만 했기에 받는 법을 알지 못하는 것일까. 밤은 자신이 위치해 있던 심연과 깊은 땅속의 숨겨진 빛을 발견해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하늘의 별들도 더욱 빛나게 해준다. 자신을 내려놓고 타인의 빛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것. 즉, 자신을 낮추고 감추는 것을 통해 그저 노랗고 파란 단일한 색감이 아닌, 여러 가지 다채로운 색으로 물들고, 어둠과 더해져 더욱 밝게 빛난다. 이러한 불빛들의 조화는 예술적이면서도 독창적이다. 아름다우면서도 다채로움을 선사한다. 밤은 늘 다른 방식으로 사랑한다. 애정을 받기만 하려는 일방향적 사랑이 아닌, 자신의 주변과 색감을 교류하며 발화하는 쌍방향적 사랑. 자신의 희생으로 상대방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는 것. 그것이 헌신적인 사랑이자 희생적 사랑 갈구이다.
 이때 등장하는 작고 사랑스러운 것이 있다. 바로 ‘별똥별’이다. 별똥별은 이 늦은 밤과 고달픈 사랑을 하는 새벽 사이에 떨어진다. 헌신과 고달픔의 사이, 즉 별똥별은 내가 사랑하지만, 사랑받을 수 없는 누군가이다. 애정이란 무엇일까, 사랑이란 무엇일까, 초반 글머리에 등장한 가장 핵심적인 물음. 더 많은 사랑과 애정을 흡수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필자는 이 별똥별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는 하나의 요소로 작용할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닿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따라가는 것이고, 희미하게 보이는 불빛에 이끌리는 어린아이처럼 작은 가능성에 목을 매는 안타까운 것이다. 비로소 그것이 떨어진 장소에 도착했을 때는 흔적도 없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신기루를 본 것 같은 착각을 준다. 아무리 빨리 따라가도 떨어지는 별의 속도를 잡을 수 없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그것을 보며 자신의 염원을 빌고, 누군가는 그것이 향하는 방향으로 맹목적으로 발을 옮긴다. 또한, 어떤 이들은 그저 그것을 바라보며 여러 감정을 느끼고, 누군가와 공유한다. 헌신적인 사랑이 이룬 어두운 밤이기에 우리는 별똥별의 흔적과 존재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가질 수 없지만 갖기를 원하고, 제대로 볼 수 없지만 꾸준히 보기를 원하며 혹시 모를 가능성에 기대에 시도하는 것. 별똥별의 작은 움직임이 불러온 나비효과이다. 그렇기에 ‘사랑’이란 우리가 그것을 기대하고, 바라보며, 소원을 빌고, 무언가에 홀린 듯 따라가고 싶은 것. 특별한 이유 없이 마음이 끌리는 것으로 어느 정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별똥별이 떨어진 이후, 새벽이 오면 우리는 필연적으로 고달픈 사랑을 한다. 떨어지고 사라진 별똥별을, 희미하게 빛나다 빠른 속도로 사라진 당신의 애정을 끝내 잊지 못한다. 잊을 수 없기에 갈구하며, 고달파한다. 결국, 밤잠을 설치고 피폐해져 가며, 고독에 휩싸이고, 그것이 선사한 애정과 사랑의 감정 주위에서 맴돈다. 헤어 나오지 못하는 아주아주 고독하고, 아련하며, 고달픈 사랑이다. 새벽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까만 어둠이 어느 순간 떠오르는 태양에게 자리를 내주기 위한 시간. 헌신적인 사랑이 지나가고 이기적인 사랑이 찾아오는 시간의 경계선. 무미건조한 회색빛을 띄는 탁한 감정. 대부분의 이들이 깊은 잠에 빠졌을 때, 찾아오는 외로움의 색감. 이를 뜬 눈으로 바라보며 함께 보내는 이들은 외로움에 사무친 이들이 아닐까.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열망하기에, 깊은 잠을 청하지 못하고 떠나간 너를 홀로 기다리는 것은 아닐까. 사색에 빠지기 가장 좋은 시간. 하루 동안 얻은 감정들을 정리하고 느끼며 곱씹어 보는 오로지 혼자만의 고독한 시간. 너를 꿈꾸기가 무섭고, 그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마주할 수 없기에 꿋꿋이 버티는 시간. 다소 미련해 보이는 새벽은 그 누구보다 고달픈 사랑이다.
 고달픈 사랑을 하고 긴 새벽의 시간이 지나면 드디어 아침이 오고, 태양이 뜬다. 새벽을 즐긴 누군가는 이기적인 사랑이 찾아오는 그 순간을 분명히 마주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작고 무엇보다 밝게 빛나던, 무척이나 사랑했던 그 별똥별을 새벽 내내 그리워했기에. 그 별이 떨어진 장소와 순간을 소리와 냄새, 그리고 온몸으로 기억하겠지. 어찌 곤히 잠들 수 있을까. 앞서 언급한 것처럼, 사랑을 특별한 이유 없이 내가 너에게 끌리는 것. 그렇기에 사랑은 그 어떤 것보다 행복하게 만들어주지만, 모순적으로 그 어떤 것보다 상처 입힌다. 사랑의 순환을 경험하고 느낀 깨달음. 이를 느끼는, 고달픈 사랑을 경험한 후에 찾아오는 시간인 아침. 아침은 쓰라린 사랑이다. 사랑받은 이들은 고달픈 사랑을 하지 않기에 쓰라린 사랑을 할 수 없다. 그렇기에 그들에게 아침은 사랑의 궁극적 결실, 즉 행복한 사랑이다. 사랑하는 이와 함께 잠을 청하고, 함께 일어나 하루를 보내는 그 시작. 기분 좋은 시작을 할 수 있는 아침은 사랑받는 이들을 더욱 돋보이게 함과 동시에 누군가에게는 지워질 수 없는 흉터를 만든다. 그렇기에 쓰라린 사랑을 하는 이들은 이 시간에 지쳐 잠에 든다.
 별똥별을 잊을 수 없었기에 고달픈 사랑이 온다. 별똥별을 마주할 수 없었기에, 따라가도 늦었기에, 결국 별똥별의 정확한 색감을 파악하지 못했기에. 쓰라린 사랑을 경험한 이들은 다시 한번 이기적으로 사랑하며, 위험하게 사랑하고. 이윽고 헌신하고 후회하며 고달파지기를 반복한다. 이 작은 별똥별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작고 밝게 빛나던 나만의 별똥별. 당신을 잊지 못하기에. 나의 아침은 밝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밤을 지새우며 밤하늘 무수히 많은 별에서 시선을 뗄 수 없겠지.
 이 글을 바라보고 있는 그대들에게 한 가지 물음을 던지며 사랑을 시간에 비유한 나의 감상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과연 그대들은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가? 그대들은 더 많은 사랑을 받고, 더 많은 애정을 흡수하여 진정으로 성숙해지고 비로소 ‘사람’이자 ‘인간’이 되었는가? 특별한 이유 없이 끌리는 당신들의 별똥별은 누구인가?
 사랑을 시간에 비유하자면, 낮은 이기적 사랑, 저녁은 위험한 사랑, 늦은 밤은 헌신적인 사랑, 여명이 떠오르는 새벽은 고달픈 사랑이다. 그리고 아침은 누군가에게는 쓰라린 사랑, 누군가에게는 행복한 사랑이다. 당신의 내일 아침이 쓰라린 사랑이 아닌 행복한 사랑이 되길 바라며, 나는 오늘도 그대들을 있는 힘껏 헌신적으로 사랑해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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