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피의 달인, 제3자 화법의 장인
지금 내가 속한 조직에는 ‘결재’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시스템 상으로는 있다. 결재선도 있고, 승인 버튼도 있다.
하지만 그건 단지 전산의 형식일 뿐, 현실의 행위는 아니다.
보고서를 올리면, 팀장은 그 누구보다 열정적이기에 슈퍼Pass
그리곤 그분이 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본 척’을 한다.
깜깜 무소식이다. 답답한 마음에 그리고 팀장의 눈치로.임원실을 Knock Knock
"메일로 보고 드렸습니다""전자결재 상신 하였습니다. 확인 부탁드림돠"
그리곤..
스크롤을 세 번쯤 내리며 “응, 그래. 잘해봐.” 한마디.
그리고 그 뒤엔 아무 말이 없다.
수정 지시도, 방향 제시도, 칭찬도 없다.
그저 “본 걸로 치자”는 듯한 묵묵부답.
결재란 그렇게 공기처럼 사라진다.
어느날 결재가 되어 더 상위 임원 향의 보고자리에서는
SBS에 '생활의 달인"에 제보 전화를 하고 싶은 순간이 찾아와 핸드폰을 만지작 거리기 일 수다.
면피의 달인, 제3자 화법의 장인
그분은 보고 자리에서도 독특하다.
직속 임원 앞에서 나를 소개할 때
“우리 팀이 이런 걸 추진하고 있더라고요”라고 말한다.
‘우리 팀이 하고 있습니다’도 아니고, ‘제가 보고받았습니다’도 아니다.
그분은 늘 제3자의 관찰자 시점으로 말한다.
마치 이 회사의 외부 자문처럼.
문제가 생기면 “제가 볼 땐 그런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성과가 나면 “팀원들이 고생을 많이 했더라고요.”
그 문장 끝마다 숨어 있는 단어는 하나다.
“저는 아닙니다.”
그분 밑에서 일하다 보면,
일이라는 게 누군가의 이름으로 끝나야 하는 것임을 절실히 느낀다.
하지만 그분의 세계엔 이름이 없다.
누가 결정했는지도, 누가 승인했는지도 모른다.
그저 ‘다들 알고 있었다’는 말만 남는다.
결국 모든 책임은 공중에 뜨고,
그 공기를 마시는 건 늘 나 같은 실무자들이다.
그럼에도 매일 마음을 다잡고 출근을 한다.
이제는 안다.
그분이 결재하지 않아도,
그분이 책임지지 않아도,
세상은 돌아간다는 걸.
결국 회사는 그런 사람을 품은 채로도 굴러간다.
그래서 나도 그 안에서 굴러간다.
결재 대신 양심으로, 보고 대신 자존심으로.
오늘도 내 이름이 없는 보고서를 작성하며,
조용히 마음속으로 결재를 찍는다.
“그래, 나는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