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여행과는 다른, 낯선 곳에서 오래 살기
코로나19 이후 일부 국가에서는 재택 근무가 상당히 자리잡혔지만 한국은 대부분 다시 오피스로 돌아가는 추세다. 이런 상황에서 해외에서 일하며 여행하는 일은 가당치도 않은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해외에서 한 달가량 머물며 여행과 일을 겸하기 그 어느 때보다 편해졌다. 재택근무 여건만 갖춰진다면 한 달 정도 다른 나라에서 머물며 일하는 것도 좋다. 이 글은 그처럼 한 달 살이를 고민하고 있지만 낯선 곳에서 일을 병행하기 힘들까 저어하는 사람들의 어려움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한 것이다.
나는 비자도 없이 2018년 출국해 2024년 현재까지 세계 곳곳을 떠돌고 있다. 팬데믹 이전에는 6개월까지 무비자로도 머물 수 있는 영국에 거점을 두고 여름을 보내고 다른 유럽 국가에서도 한두 달 지낸 후 겨울이 되면 방콕에서 지내고 날이 따뜻해지면 다시 유럽으로 돌아와 같은 주기를 거치곤 했다. 물론 팬데믹 동안에는 해외여행을 할 수 없었다. 팬데믹이 거의 끝나갈 무렵에 다시 유럽으로 나와 한 달에 한 도시를 여행하며 이리저리 떠돌다 2022년 말부터 크로아티아에서 장기 체류권을 얻어 지내고 있다.
내 여행은 쉼이나 휴식과는 거리가 있다. 왜냐하면 나는 어디로 가든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즉, 나는 이른바 ‘디지털 노마드'다. 일을 겸하는 여행을 일컬어 '워케이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워케이션은 여행과 중요한 점에서 차이가 있다. 바로 일을 위한 공간과 시간, 인프라를 확보하고 여기에 추가 비용이 들더라도 감수한다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내가 내 돈 내고 비즈니스 출장을 온 것으로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워케이션을 위해서는 여행을 할 때와는 조금 다른 부분에 주안점을 두고 정보를 수집하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
돈이 조금 더 들더라도 안정적인 숙소를 고를 것
단기 여행을 할 때는 (호캉스가 아닌 이상) 특별히 시설을 잘 갖춘 숙소를 찾을 필요는 없다.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집 밖에서 보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넓은 공간이나 부대시설보다는 관광지에서 가까운지, 즉 위치가 더 중요한 경우가 많다. 워케이션은 이와 반대로, 위치는 중심지에서 조금 벗어나 있어도 되지만 오래 머물기에 적당한 시설을 갖추고 있는지 살펴야 한다. 하루 8시간 이상 일한다면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보내야 하므로 공간도 널찍한 편이 좋고, 이왕이면 단단한 의자와 테이블을 갖춘 곳이 좋다. 세탁기나 주방 시설도 완전히 구비하고 있는지 확인해야 한다. 다시 말해, 일상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인프라를 갖춘 곳을 선택하되 이로 인해 추가로 드는 비용은 중심지에서 조금 떨어진 곳을 선택함으로써 상쇄하는 것이다. 가령 서울을 예로 들면 홍대 입구나 이태원, 명동과 같이 관광지의 한 중심에 있는 곳보다는 성산동, 후암동, 공덕 등 여전히 도심과의 접근성은 좋지만 관광객보다는 현지인의 비중이 높으며 비용도 더 저렴한 곳을 선택한다.
숙소에서 오랜 시간을 머문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리고 일을 제대로 하지 못했을 때 잃을 수 있는 기회비용을 고려할 때, 무작정 저렴한 숙소를 찾기보다는 돈이 조금 더 들더라도 안정적인 숙소를 선택해야 한다. 특히 와이파이가 매우 중요하다. 숙소 리뷰를 읽어보고 와이파이에 문제가 있다는 리뷰가 하나라도 있으면 그 숙소는 거르는 것이 좋다.
일상적인 식사를 준비할 것
평소에는 무의식적으로 수행하다가 낯선 곳에 떨어지면 그제야 내가 지금까지 이 일을 어떻게 해낸 건자 싶은 것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식사'다. 원래 살던 곳에서 지낼 때는 나름대로 끼니를 때우는 방식을 터득하고 있다. 집에서 직접 밥을 지어먹든, 시장에서 반찬을 조달하든,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사 먹든,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식사를 하는지 자기만의 루틴을 가지고 있고, 이러한 루틴은 대개 무의식적으로 수행된다. 그러나 해외로 나가면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지식은 모두 쓸모가 없어진다. 숙소에 어떤 도구가 갖춰져 있을지는 그야말로 복불복이고, 식재료를 어디서 사는지도 모른다. 계란프라이처럼 간단한 음식도 만만하지 않다. 계란프라이를 하려면 계란만 있으면 되는 게 아니라 식용유와 소금도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행을 할 때 식사는 보통 레스토랑에서 해결하지만 장기 여행 시 매끼를 음식점에서 먹는 것도 (비용도 비용이지만) 생각만큼 쉽지는 않다. 특히 하루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일을 한다면 끼니마다 음식점을 찾아가서 낯선 언어로 된 메뉴를 읽는 것 자체도 버거울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일주일만 지나면 집밥이 사무치게 그리워진다. 외국도 외식 음식은 기름지고 자극적인 경우가 많아 얼마 지나지 않아 물리기 때문이다.
동남아나 일본으로 여행을 간다면 그나마 음식이 한국인 입에 잘 맞으며 저렴해서 외식이나 배달 음식으로도 한 달쯤 버틸 수는 있다. 특히 한국 음식점이 많기도 하고 식재료 또한 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유럽이나 미주의 경우는 외식은 많아봐야 일주일에 세끼 정도이며 대체로 해 먹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이러한 국가에서는 숙소 근처에 큰 슈퍼마켓이 있는지 확인해야 하며 특히 한국 식료품점의 위치를 알아두어야 한다.
쌀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구할 수 있다. 물론 한국 품종의 쌀은 한국 식료품점에만 있지만 동남아에서는 재스민쌀과 같은 장립종, 유럽에서는 리조또용으로 한국쌀과 유사한 단립종 쌀을 구할 수 있다. 한국에서 나올 때 마른미역과 김을 챙겨 오는 것도 좋다. 미역국은 한국 음식이 먹고 싶을 때 해외에서 해 먹기 좋은 음식이다. 미역만 있으면 다른 재료들(마늘, 간장)은 어느 나라에서든 쉽게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심과의 접근성을 고려할 것
체류할 지역을 선택할 때도 도심과의 접근성을 고려해야 한다. 노트북에 물을 쏟을 수도 있지 않은가. 갑자기 공증이 필요해 대사관을 찾아야 할 수도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외딴 지역의 오두막이나 해변가 방갈로 등은 너무나 매력적이지만 일을 하는 입장에서는 여러 위험 요인을 감수해야 한다. 그런 이유로 디지털 노마드는 일하기 위한 인프라가 갖춰져 있는 곳, 즉 도심을 선호하게 된다. 해변가나 산간벽지라도 디지털 노마드가 모여들어 이미 촌을 이루고 있는 지역, 가령 포르투갈의 마데이라 같은 곳은 좀 더 안전하게 일할 수 있다. 도심이나 이러한 지역은 특히 코워킹 오피스를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짧은 기간 체류한다고 해도 코워킹 오피스를 이용할 수 있는지 확인해 두는 것이 좋다. 숙소에서 일을 할 수 없는 경우 임시방편으로 이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네트워킹의 이점도 누릴 수 있다. 마지막으로 도심은 한국 식료품을 구하기도 쉽다는 어마어마한 장점이 있다.
여행안내책자보다 출장 가이드
그래서 장기 여행 시에는 여행안내책자보다는 KOTRA 해외출장 가이드가 보다 유용하다(리디북스 등 전자책 플랫폼에서 무료로 다운로드할 수 있다). 여행 책자에서는 다루지 않는, 여행자가 아니라 현지인들 사이에 섞여 살기 위해 알아야 할 정보, 예를 들어 현지 (비즈니스) 예절, 현지인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 현지에서 한국 음식을 구하는 방법들도 담겨 있다. 바로 이런 것이 어떤 지역에서 장기간 머물 때 알아야 할 사항이다.
최근에는 여행보다 장기 체류에 보다 중점을 두고 정보를 제공하는 사이트도 늘어나고 있다. 그중 가장 유명한 '노마드 리스트(https://nomadlist.com/)'는 워케이션 하기 좋은 도시의 순위를 매기며 와이파이 속도, 한 달 체류 비용, 1년 기후, 안전성, 외부인에 대한 친화성 등 장기 체류 시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들을 제공한다.
코워킹 오피스 활용
코워킹 오피스에서 일을 하지 않을 사람이라도 체류할 지역의 코워킹 오피스는 미리 검색해 보는 편이 좋다. 일단 코워킹 오피스가 얼마나 발달해 있는지를 보면 그 장소가 디지털 노마드에게 얼마나 친화적인지 알 수 있다. 쉽게 말해 코워킹 오피스가 밀집해 있는 지역은 디지털 노마드가 지내기 편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갑자기 인터넷이 안 되는 등 돌발 상황이 생겼을 경우를 대비해 숙소 근처에 있는 코워킹 스페이스를 알아두는 것도 좋다. 또한 디지털 노마드가 많이 모이는 곳에서는 코워킹 스페이스에서 네트워크 이벤트도 자주 기획하므로 팔로우하면서 네트워크 기회를 찾을 수도 있다. 코워킹 오피스는 보통 도심 중에서도 사람들의 이동이 가장 많은 최-중심지에 있는 경우가 많아 출퇴근하는 동안 도시의 풍경을 즐길 수 있다는 묘미도 있다.
업무 루틴을 해외에서도 유지할 것
일을 하면서 여행을 하는 것(혹은 여행을 다니며 일을 하는 것)이 미디어에 비치는 만큼 한가롭거나 화려하지는 않다. 해외에 있다고 일이 줄지는 않으니 한국에서 하루 8시간 일하는 사람은 해외에서도 8시간 꼬박 일하고, 하루 중 남는 시간이 있더라도 여행자들처럼 도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지는 못한다. 다시 말하지만 비즈니스 출장과 마찬가지다. 한국에서 업무가 끝나고 이것저것 하고 나면 하루 중 2시간 정도밖에 자유 시간이 남지 않는다면 해외에서도 그렇다. 일정을 계획할 때는 그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쯤 되면 디지털 노마드란 이쪽 도심에서 부대끼며 일하던 사람이 장소만 바꿔 다른 쪽 도심에서 부대끼며 일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물론 디지털 노마드의 일상이 그 정도로 삭막했다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오피스 근무를 포기하고 디지털 노마드를 삶의 양식으로 채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같은 시간 동안 같은 업무를 해도 그저 장소를 옮기는 것만으로도 쳇바퀴에서 벗어난 것 같은 신선함을 느낄 수 있다. 계획만 잘 짜면 해외에서도 계속 일하고 수익을 내면서도 여행의 설렘은 그대로 이어갈 수 있다.
풀타임으로 일하면서 한 달 살이를 하는 동안 '여행'에 들이는 시간이 얼마일지 짐작해 보자.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주 5일 8시간씩 일하는 사람이라면 온전히 여행에 들일 수 있는 시간은 하루에 2시간 정도가 최대일 것이다. 그렇게 계산하면 일주일 동안 온전히 도시를 탐험하는 데 들이는 시간은 사흘, 한 달 동안에는 12일일 것이다. 생각보다 짧다. 그럼에도 이 시간을 한 달 동안 널리 분산시켜 놓으면 단기 여행에 비해 그 장소를 더욱 깊이 경험할 수 있다. 즉, 단기 여행 시에는 하루에 관광지를 서너 곳 씩 다닌다면 장기 여행 시에는 이를 한 주 동안 분산시켜 하루에 관광지 하나씩 이삼일 간격으로 다닌다. 주말에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활동을 중심으로 일정을 짠다.
이처럼 긴 호흡으로 도시를 살아낼 때는 같은 장소도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리스 아테네는 복잡한 골목들로 이루어져 있어 어딜 가도 새롭지만 어디에서도 언덕 위 파르테논 신전이 보인다. 그리고 어떤 골목에 서 있는지, 그날 날씨는 어떤지, 해는 얼마나 높은지에 따라 파르테논은 새삼 달라진다. 그렇게 매일 달라지는 파르테논을 매일 바라보며 수천 년 전부터 저 신전을 보아 온 아테네인들의 마음속에 어떤 형상이 새겨졌을지 상상하곤 하는 것이다.
시간에서 좀 더 여유로워지면 도시를 더 다각도로 즐길 수 있다. 매주 색다른 이벤트를 진행하는 카페가 있다면 그러한 카페를 적어도 네 번은 방문하며 매번 새로운 이벤트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도시를 보다 깊숙이 파헤칠 수 있다. 특히 건물의 외장만이 아니라 그 내부에 들어가 볼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호텔이나 박물관처럼 관광객에게 보이기 위한 실내가 아니라 현지인들의 삶의 공간으로 직접 들어가 보는 것이다. 코워킹 오피스뿐만 아니라 헬스장이나 공공 도서관, 에어비앤비, 대학 등이 우리와 같은 단기 체류객들이 현지인들과 생활을 공유하도록 허가된 공간이다. 공연장 정보도 미리 알아두면 좋다. 일정이 잘 맞다면 한국에서 보기 어려운 공연이나 음악회도 참석할 수 있다.
무엇보다 비용 측면에서, 한 달을 산다고 해서 단기 여행에 비해 비용이 비약적으로 높아지는 것은 아니다. 단기 여행 시에는 짧은 시간 동안 많은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최고 중심지에, 푹 쉴 수 있는 조금 호화로운 숙소를 예약하고 비싼 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체류가 장기화되면 이런 점에서 좀 더 여유로우므로 조금 더 외곽에 숙소를 정해 경비를 절약할 수 있다. 또한 에어비앤비 등은 장기로 예약할수록 할인 혜택이 높아진다. 숙박비 다음으로 여행 경비에서 크게 차지하는 것이 식비인데, 장기 체류 시에는 집에서 적당히 요리해 먹을 수 있으므로 단기 여행처럼 매끼 음식점에서 먹을 필요는 없다. 내 경우에는 (상황에 따라 다르지만) 체류 경비는 7일 정도까지는 일수에 비례하여 증가하다가 그 이후에는 완만하게 늘어나는 것으로 보였다. 따라서 한 달 여행 경비는 7일 여행 경비의 두 배 정도로 짐작할 수 있다.
누구나 여행지에서는 시간이 금방 지나간다고 느낀다. 장기 여행자들도 다르지 않다. 한 달을 기약하고 왔지만 어느새 떠나야 할 때가 온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여행지에서 보내는 한 달은 일상에서 보낸 한 달에 비해 길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다시 일상의 익숙한 생활로 돌아가면 그 차이가 확연히 느껴진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자극들을 소화시키며 뇌를 확장시키는 동안의 한 달과 절차기억에만 의존해도 되는 한 달은 전혀 다르게 체감된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더 빨리 지난다고 느끼는데 같은 이치인 것으로 보인다. 여행지에서 우리 뇌는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새로운 정보를 습득하고 그 정보들을 생존하기 위한 삶의 지식들로 바꾸느라 반짝반짝 빛나게 된다. 여행자들이 좇는 도파민도 바로 이러한 자극 아닐까? 디지털 노마드들이 불안정함과 피로, 친지들과의 거리감 등을 호소하면서도 여행을 다시 시작하는 이유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 어느 때보다 여행이 쉬워진 지금, 사람들이 이 새로운 삶의 방식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