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닌가?
아빠 엄마는 늘 싸우기만 했다. 언제 한번 다정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어떻게 사랑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저 마음이 설렐 뿐이다. 그런데 이게 사랑의 시작이 맞을까? 나를 좋아한다는 말은 안 했지만 책도 빌려주고 뭐 갖고 싶냐고까지 물어봤으니 분명 이건 사랑일 거야. 아니야. 다른 동무들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물어볼까? 아니 아니야, 그러면 누구냐고 물어볼 거고 많은 동무들이 좋아하는 그 동무라고 어떻게 말해? 안돼 안돼.
이제 자 볼까? 애써 눈을 감지만 자꾸 그 동무를 만난 순간이 생각난다. 자기의 계획을 나에게 말해주다니. 내일 못 올 수 있으니 모래 보잔다. 심장이 더 세게 뛴다. 잠이 오지 않을 것 같다. 오늘은 내 생애 최고의 날 같다. 안 자도 상관이 없다고 본다.
잠이 안 올 것 같은 밤이 지나고 새날이 왔지만 내일이 되려면 아직도 한참이나 남았다. 다른 동무들은 다 힘든 공사일 하러 가지만 나는 이발하는 미용실로 향한다. 조금 눈치가 보이지만 그렇다고 공사장에 가기는 싫다. 오늘은 몇 명이나 오려나?
한 명, 두 명, 세 명...
시간이 너무 안 간다.
그 사람이 없는 세상은 시간이 너무 가지 않는다. 가슴은 뛰지만 시간은 멈춰 있다. 좀처럼 가지 않는다. 잠도 오지 않는다.
...
지나지 않을 것 같았던 그 하루가 드디어 지나갔다. 새로 찾아오는 아침이 이렇게 반가웠던 적이 없다. 그렇게도 안타깝게, 간절히 기다려서였을 것이다. 세수를 하고 중대 모임하고 밥 먹으니 아침 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그리고 또 매일 하는 그 머리 깎는 일, 그걸 한다. 째깍째깍 손이 짜개 바람 일지만 힘든 공사현장보다는 백배 나은 걸 알기 때문에 타발 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이 힘든 것이 아닌 게 되지는 않는다. 가끔 쉴 때 저녁이 기다려진다. 그 명국 동무 말이다. 뭐 사 왔을까?
...
저녁 식사 후 취침 전 화장실을 간다. 화장실 뒤 두 번째 황철나무. 내가 갔을 때 이미 그 사람이 와 있으면 좋겠다. 그런데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 너무 떨려서 말이다. 이제 만나면 뭐라고 말하지? 먼저 말을 걸어 줬으면 좋겠다. 그런데 내가 받으면 나도 뭘 해줘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뭘 해주지? 해 줄게 없다. 이게 내 처지인 건가?
황철나무에 거의 다 가까이 갔을 때쯤 저 뒤에서 그림자가 보인다. 어마나, 벌써 와 있었나 봐.
"옥미 동무!"
"어마나! 네!"
"이거 혹시 마음에 들지 모르겠소"
그가 꺼내서 건네준 건 연지(립스틱)였다.
"네! 마음에 들어요."
"혹시 동무네 아버지 성함 알 수 있겠소?"
"네! 김덕철입니다"
왜 아버지 성함을 물어보지? 부끄럽지만 나를 색시 삼으려고 이미 결정한 건가?
"혹시 책이 재밌으면 세기와 더불어 2권도 빌려 줄까요?"
"네!"
이건 분명히 내일도 또 여기서 보자는 신호다. 주책없이 빨리 뛰는 심장 때문에 정신을 못 차리겠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인데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
...
그렇게 몇 달이 흐르고 오랜만에 집에 휴가를 갔다 오게 되었다. 늙어서도 맨날 싸우는 아빠, 엄마는 보기 싫지만 집에 가면 마음껏 먹을 수 있는 배가 있어서 좋다. 봄이면 하얗게 만발한 배나무 들 속에 흰 연기가 피어오르는 우리 집. 싸움 소리 그칠 새 없지만 몰래 나와 먹는 배 맛은 늘 꿀 맛이었다. 특히 새벽에 먹는 배맛이 최고다. 그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나저나 집에 가면 누구 사귀는 사람 없냐고 묻지 않을까? 그러면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배 밭 어귀가 보일 때쯤부터 달콤한 배 향이 달려와 나를 반긴다. 세상이 다 싫어도 이건 싫어할 수 없다. 이 마저 싫어한다면 그건 사람이 아닐 것이다. 해가 떨어져 가고 집집마다 조금씩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다. 어두워지는 하늘에 피어 올라가는 연기는 자신만의 그림을 마음껏 그려간다.
"언니~!"
막내 여동생이 막 달려온다. 아직 학교에 다니는 동생이 두 명이나 된다. 낼이면 은근 자랑하고 싶어서 친구들 데리고 집에 올게 뻔하다. 그런 게 싫지는 않다. 다만 지금은 나의 남자관계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지가 너무 고민이다.
"옥미야! 이제 어린 나이도 아닌데 돌격대에 좋은 남자 없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내 입으로 말하기가 아직은 부끄럽다. 하지만 온몸으로 신호가 뿜어져 나오고 있다. '있어요. 남자'라고 말이다.
"언제 한번 데리고 오라"
"네"
오랜만에 집에 왔다고 엄마가 쌀밥에 반찬도 여러 가지 차려 놓으셨다. 엄마 얼굴은 더 까매졌고 주근깨도 더 많아졌다. 엄마는 항상 말이 없다. 대신 손은 항상 빠르고 쉴 새가 없다. 그 덕에 우리 육 남매는 굶어 본 적이 없다. 동그랗고 조그마한 얼굴에 침착하게 내려앉은 눈, 그것은 아마 엄마의 매력이었을까? 이런 엄마가 아빠는 좋은 게 분명했을 것이다.
엄마가 해준 밥을 먹으니 금방 잠이 온다. 몸과 마음은 이제 진짜 쉴 준비를 마쳤다. 소리 소문 없이 빨리도 잠이 들었다.
여기가 어디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지금 기차를 타고 있다. 내 주변 동무들은 신이 나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무엇이 이리도 좋은 것인가? 그런데 내 마음은 왜 이런가? 너무도 우울하다. 기차 창밖으로 수도 없이 전보대가 스쳐 지나가고 수많은 산들이 지나간다. 가도 가도 끝이 없다. 어디까지 가는 걸까? 나는 왜 이리도 슬픈 것인가?
“벌컥!”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꿈이다. 영 마음이 뒤숭숭하다. 꿈속의 내 모습이 너무 마음에 걸린다. 엄마는 아침이면 배 밭은 한 바퀴 휙 돌면서 썩은 배를 주어 오는 것이 일과다. 마음도 뒤 숭숭하고 엄마 뒤를 따라 나간다.
“엄마!”
“왜? 좀 더 자지 않고”
따라나서길 잘했다. 문 밖을 나서자 상쾌한 공기가 실은 배 냄새는 어김없이 그대로이며 온갖 시름이 달콤함에 항복해 버린다. 조금 숨 돌릴 사이에 엄마는 저만치 앞으로 가버렸다. 종종종 뛰어 따라잡는다. 썩은 배를 한알, 두 알 박바가지에 담는다.
“엄마, 엄마는 어떻게 아버지랑 결혼했어?”
“말도 말아라. 저 뒷집 미숙이네 아버지가 너네 아버지랑 맛 세워주는 바람에 그렇게 됐다.”
“그럼 엄마는 아버지가 싫었어?”
“사실 마음에 드는 다른 사람이 있었지. 뜨락또르 모는 사람이었는데, 그 기술이면 이런 농장에서도 이렇게 아득바득하지 않아도 될 텐데.”
“근데 애 그 사람이랑 안 됐는데?”
“우리 주인집 밭에 그 사람이 와서 일한 적이 있는데, 그때 나한테 살림 차리자고 하더라고. 처음이라 겁이 나서 아무 말도 못 했는데... ”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아니 그때 우리 저 뒷집 미숙이네 아버지가 우리 주인님한테 와서 너네 아버지라 선보이라고 했는데 주인이 그렇게 하라고 하니까 그렇게 했지.”
“엄마 솔직히 말해봐. 아빠 처음 봤을 때 어땠어? 그때도 싫었어?”
“처음 봤을 땐 사실 좋았지. 너네 아버지 잘 생겼잖니. 그런데 그때 눈이 삐었지. 으~쯧쯧 쯧!”
“엄마도 아빠 좋아했구먼!”
아무 말이 없다. 너무 일을 많이 해서 까만 손, 까만 얼굴. 이 엄마에게도 꽃봉오리 같은 처녀 시절이 있었구나. 아빠를 처음 봤을 때 좋았다는 말은 나도 모르게 좋다. 이것으로부터 느끼는 나의 이 마음은 무엇인가?
집에서의 날들은 어찌나 빨리 흘러 가는지. 짧은 이틀의 휴가는 금세 끝나버렸고 나는 돌격대 부대로 복귀했다. 그런데 큰 숙제가 생겼다. 우리 집에 인사 가자고 어떻게 말하지? 아니 먼저 인사를 가야 하나? 근데 이런 걸 여자가 먼저 말하는 건 체면이 있지, 용납이 안된다. 잠자코 기다리자.
숙소에 도착하자 방 동무들이 무슨 얘기를 나누는지 쉴 새 없이 바쁘다. 슬쩍 들으니 명국동무 얘기다. 그 동무네 가족이 글쎄 빨치산 줄기란다. 수령님과 함께 항일 빨 지산 운동을 함께한 투사 집안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보통은 가지고 있지 않는 회고록을 가지고 있었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조금의 걱정이 밀려온다. 나는 그 동무의 충성심에 따라갈 수 있을까? 발을 맞출 수 있을까?
...
하루, 이틀 시간은 계속 흐르는데 그 동무는 나를 찾지 않는다. 어떻게 된 일일까? 그 동무의 마음이 바뀐 걸까? 그동안 다른 여성 동무라도 마음에 든 걸까? 수많은 물음표들이 꼬리를 물고 나를 괴롭힌다. 나는 이 미궁에서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자석에 이끌리듯 엄마 집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말에 빨리 다녀오겠다고 소대장에게 허락을 구했다. 소대장은 나의 표정을 보고 심상치 않다고 느꼈는지 잘 쉬고 오라고 흔쾌히 승낙을 해 주었다. 그리고 다녀오면 중요한 결정을 알려주겠다고 한다.
일요일 하루 쉬는 황금 같은 날이다. 보통은 집에 잘 가지 않는데 휴가로 집에 왔다 간지 얼마 안 됐는데 또오리 엄마 아빠는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속사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나의 표정은 엄마, 아빠에게 읽히고 말았다. 말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 물어본다. 하는 수없이 터 놓기로 하고 말을 꺼냈다.
"얼마 전부터 친하게 된 동무가 있는데 왜 집에 인사 가자는 얘기를 하지 않을까? 그 동무네는 엄청난 당일군 집안이라고 하는데 우리 집이 너무 한심해서 그러는 걸까?"
...
갑자기 두 분 다 말이 없으시고 수심이 가득하다.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하다. 뭘까?
"말해주세요. 혹시 이유를 알고 계세요?"
"이제 너도 어린 나이가 아니니 말해 줄 때가 된 것 같구나. 사실 너의 할아버지는 황해도에서 치안대(1950년 전쟁 당시 미군, 남한 괴뢰군에게 인민을 팔아넘긴 사람들) 였단다. 그 남동무의 집이 엄청난 당일군 집안이라면 이미 우리 집에 대해 알고 있을 수도 있을 것 같구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다. 우리 할아버지가 반동이었다니. 그렇다면 그 동무가 내게 더 이상 물어보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나의 마음은 쉽게 포기가 되지 않는다. 이 신분을 뛰어넘을 방법이 정말 없을까? 그럼에도 그 동무가 나를 사랑해 줄 수는 없는 걸까?
부대로 복귀하였으나 나는 어깨를 펼 수가 없고 눈을 들 수가 없다. 우주는 나를 땅으로 끌어당기며 숨을 쉴 기회를 주지 않는다. 소대장이 나를 부른다.
“소대장 동지 부르셨습니까”
“옥미 동무 앉소. 중요한 결정이 있어 불렀소. 다름이 아니라 내일 대대장 동지께서 보자고 하는 구만”
“네 알겠습니다”
대대장 동지는 이발하면서 몇 번 뵌 적은 있으나 나를 그렇게 호의적으로 보시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대대정치지도원 동지가 나를 딸처럼 예뻐해 주시고 이 이발 일까지 할 수 있도록 해주셨다. 참 감사한 분이다. 그런데 대대장 동지는 왜? 대대장 동지가 부를 때는 진짜 안 좋은 일이거나 좋은 일 두 가지 중 하나이다. 좋은 일이었으면 좋겠다.
조심스럽게 복장 단정히 하고 대대장 동지 방으로 향한다. 가는 길에 누군가 나에게 손짓을 한다. 대대 정치지도원 동지다.
“옥미 동무”
“네 정치지도원 동지”
“대대장이 불렀지?”
“네!”
“다른 게 아니고 동무네 중대 사관장이 공사장에서 사고가 있어서 갑자기 제대하게 되어 사관장 자리가 빈다는 구만. 그래서 동무를 추천했더니 그렇게 한다고 해서 아마 지금 가는 걸 거요.”
“정치지도원 동지. 감사합니다.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 ”
“됐소. 동무야 워낙 똑 부러지고 똑똑하니까 내가 추천한 거고 사관장 일도 잘할 거요”
“감사합니다.”
내가 사관장이라니. 집을 나온 지 이제 3년이 되어 간다. 참 쉽지 않은 나날들이었다. 처음 돌격대 일을 시작했을 때 나는 1달도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그런데 정말 다행히도 정치지도원 동지의 총애를 받아서 이발 학교를 가면서 일이 쉽게 풀렸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한데 사관장이라니. 너무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똑똑똑”
“들어오시오”
“아 옥미동무. 거기 앉소. 옥미 동무 그래하는 일은 어떻소?”
“좋습니다. ”
“그래. 다름이 아니라 동무네 중대 사관장 동무가 갑자기 사고로 제대하게 되어 동무를 사관장으로 임명하기로 하였소.”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옥미 사관장 이겠구먼. 사관장의 직무를 오래 비울 수 없어서 다음 주부터 바로 시작해야 할 거요.”
“네”
“가보시오.”
“네 알겠습니다.”
내가 사관장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정치지도원 동지의 추천이 없었다면 아마 나는 꿈도 못 꿨을 직책이다. 가문의 영광이다. 이제 우리 나이 또래가 슬슬 직책을 맡게 되는 시기이다. 그 동무는... 아마 빨치산 줄기이니 보나 마나 빨리 승진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