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운명이라고 하는 이 남자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다. 차라리 일이 힘들었으면 좋겠다. 몸이 피곤하고 지치고 힘들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머리는 덜 아프지 않을까? 마음은 덜 아프지 않을까? 이렇게 힘든 감정에 신경이 덜 쓰이지 않을까?
보고 싶다. 너무 보고 싶다. 그렇다고 해서 남자 기숙사 근처에서 맴돌고 싶지는 않다. 온 부대에 내가 얼마나 애원하고 매달리는 남자가 있는지 알리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속만 타 들어갈 뿐이다. 사관장이 됐다고 동기들이 축하해 주지만 하나도 기쁘지가 않다.
부대에 새로운 방침이 내려왔다. 농촌에 일손이 부족해 돌격대에서도 농업에 지원인력을 보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얼마 전 "도시처녀 시집와요" 영화를 방영하더니 돌격대에까지 해당 방침이 내려온 것이다. 거의 모든 여 동무들은 시골에 가는 것을 싫어했다. 나 또한 협동농장원 부모의 밑에서 자라 농촌으로 가는 것은 그리 달갑지 않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이 농촌으로 가서 몸이 피곤하고 힘들 수 있는 기회 일 것 같다. 사관장으로 승급한 지 얼마 안 됐지만 내가 간다고 하면 위에서도 좋아할 것 같다. 아무도 안 가겠다고 하는데 내가 간다고 하면 조를 묶어 보내기가 쉬워지기 때문이다.
바로 중대장에게 농촌지원을 가겠다고 의사를 전달하였다. 중대장은 좋아하며 바로 조를 편성해 주었다. 일은 너무도 빨리 일사천리로 진행이 되었다. 이 소식은 분명 명국 동무에게도 들릴 거야. 그럼 조금이나마 나를 걱정하지 않을까? 운명이라고 확신한다면 나를 찾아오지 않을까? 앞서 나가는 나의 마음을 잡을 길이 없다. 나는 아직 그 사랑을 놓고 싶지가 않다. 그 동무도 제발 같은 마음이었으면 좋겠다. 온 세상이 우리의 만남을 달가워하지 않겠지만 그 동무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
나의 바람과는 다르게 농촌지원을 출발하기까지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은 나에게 지나치도록 잔인한 흔적들을 남기며 흘러갔다. 나는 지체 없이 새로 편성된 농촌지원 부대를 이끌고 지원을 떠났다. 처음에는 다들 싫어하더니 정착 열차에 오르니 좋아하는 눈치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열차 바람은 생각보다 시원하고 정신없던 생각을 마구 후려쳐 버린다. 건너편 칸에 탄 군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눈길을 받을 수 있을지 고민하는 부대원들, 괜히 튀는 행동 해서 호상 비판 대상이 되지 않으려고 서로 눈치만 보고 있다.
그래, 우린 머릿속에 일 순위 관심사는 남자이다. 왜 이토록 집착하는가? 왜 이토록 멈출 수가 없는가? 20살, 21살, 22살 애 어린 처녀들. 그들은 돌격대원이기 전에 사실 처녀이다. 가슴에 멋있는 남자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아가씨들이다. 아직 없는 처녀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그 남자를 만나려고 안달이다. 사실 결혼 정년기까지 몇 년이나 남았지만 우리의 가슴은 그 정년기를 기다릴 마음이 없다.
농촌지원 지역 기차역에 도착했다. 나도 청진에서는 시골에 속하는 농촌에 살았지만 이곳은 너무하다. 산이 너무 가까이에 있다. 사방에 보이는 건 산뿐이고 아기자기한 집들이 올망졸망 줄지어 서있다. 고층 건물은 하나도 없다. 제일 놓은 것은 역 맞은편에서 보이는 영생탑뿐이다. 사람들의 낯 빛은 한일 농사 일만 해온 우리 엄마처럼 새까맣다. 생각보다 낯설지 않고 오히려 정겹기까지 하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직 모르나 분명 인솔자가 올 것이다. 멀리 밀짚모자를 쓴 농촌 청년이 우리에게로 오고 있다. 얼굴 전체가 보이지 않으나 걸음걸이가 밝다. 힘이 있고 거침이 없다. 눈이 보일 때쯤 우리 부대원들의 화색이 돈다. 농촌에 왜 이렇게 잘생긴 총각이 있는가? 쓸데없이.
우리는 그가 시키면 뭐든 다 할 기세다. 그는 우리 짐을 실을 달구지를 역전 옆에 준비해 뒀고 거기에 짐을 다 싫은 뒤 그의 뒤를 따라 걸어간다. 한 총각 뒤에 10명도 넘는 처녀들이 졸졸졸 따라간다. 걷는 내내 심심하지 말라고 우리를 쉴 새 없이 웃겨준다.
"농사는 해 보셨소?"
"아니요"
떼로 약속이나 한 듯 박자 맞춰 대답한다.
"하~ 그럼 한 며칠은 엄청 힘드시겠소"
"괜찮아요"
"그런데 동무, 여기 머루도 있나요?"
"그렇소"
"혹시 꽈리도 있나요?"
"그렇소. 하지만 머루도, 꽈리도 가을이 되어야 하니 한 여섯 달은 고생해야 먹을 수 있을 거요"
"아 ~ 그렇군요"
얼굴에 웃음기와 장난기가 가득 찬 청년은 처음 보는 우리에 대해 아무 거리낌이 없다. 우리가 물어보는 말들에 일말의 망설임 없다. 남자들 속 여자는 기가 살지만 여자들 속 남자는 바보가 된다는 말이 무색하다. 꽤 많이 걸은 것 같은데 전혀 힘들지가 않다. 저 앞 군부대 초소가 보인다.
“섯! 누구얏!”
청년이 보초병에게 다가가 쏙닥쏙닥 하고 온다. 바로 차단봉을 열어주고 우리는 달구지 뒤를 따라 길을 통과한다. 보초를 서는 군인은 여군이다. 여군은 실제로 처음 본다. 생각보다 깔끔하고 단정하며 어깨에는 힘이 들어가 있다. 돌격대 복장을 한 우리보다 자신이 더 낫다는 우월감을 장착한 것일까?
“동무, 여기 여군들은 어디에서 오는지 아나요?”
“아마 저 앞쪽에서 올 거요”
“알고 지내는 여군도 있나요?”
“없소.”
“왜요? 예쁘고 괜찮은 여자들이 많아 보이던데요?”
“여군에게는 관심이 없소. 이제 저 언덕 길만 넘으면 곧 숙소에 도착하오.”
언덕길을 지나니 또 보초병이 길을 지키고 있다. 이번에는 물어보지 않고 차단봉을 열어준다. 그렇게 넓지 않은 흙길을 따라 옆에 작은 시내가 흐른다. 시냇가 오른쪽에 처음으로 고층 건물이 보인다. 시골에 더 좋은 건물이 숨어 있다니. 딱 봐도 좋아 보인다.
“동무, 여긴 어딘가요?”
궁금한 걸 참지 못하는 부대원 중 한 명이 물어본다.
“답사 숙영소요. 보통 저 앞쪽 지역 군관들이 오는 것 같습니다.”
시골인데 이렇게 세련되고 좋은 곳이 있다니. 의외라고 생각한다. 하긴 우리가 오랫동안 공사 진행했던 칠보산도 엄청 산골이었다. 칠보산은 유명한 명소였다는 게 다르긴 달랐던 것 같기도 하다. 이런저런 생각하며 졸졸 따라가다 보니 어느새 숙소에 도착한 모양이다.
“워워워! 워!”
소달구지를 멈추고 우리 짐을 내린다. 각자 자기 짐을 찾아들고 숙소로 들어간다. 집이 깔끔한 편은 아니나 곳곳에 두꺼운 책들이 있다. 나는 여기 있는 동안 식당 당번인 동무들과 이 집을 깔끔하게 거둬주고 관리해주고 싶어진다. 저 책들은 이 집 청년의 것인가?
우리가 짐을 정리하는 동안 밖이 좀 더 시끄러워졌다. 동네 총각들이 다 몰려온 모양이다. 청진 시에서 처녀들이 왔다고 하니 그들도 호기심이 발동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런 농촌의 총각들이라고 하기에는 쓸데없이 잘생기고 키도 크다. 막 어두워지니 부뚜막에 불을 땐다. 우리 부대 식당 당번 동무들이 저녁 식사에 필요한 쌀을 꺼내고 밥을 한다. 온돌이 따뜻해진다. 우리는 이 집 청년과 어머니의 밥까지 해서 상을 차렸다. 밥을 먹을 때가 다 되었는데 그 남자는 사라졌다. 다들 말없이 그 남자를 찾는다. 식사를 다 마칠 때쯤 밖이 또 시끄러워진다. 친구들 데리고 온 모양이다. 식사 후 우리는 궁금한 마음에 밖에 나가 본다.
길 옆 돌 담에 그 남자가 기타를 치며, 노래하며 앉아 있다. 그의 선창으로 친구들이 같이 노래 부른다. 한 밤중에 울려 퍼지는 기타 소리와 노랫소리! 왜 이렇게까지 좋아야 하는가? 생각했던 것보다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 같다. 잔잔한 기타 선율에 짝을 이룬 노랫소리가 우리를 유혹했다. 하지만 첫날 우리는 대문 틈으로 몰래 내다볼 뿐 아무도 나가지 않는다. 그럴 용기가 없거나, 아니면 처녀로서의 체면을 세우려는 심상이다.
큰 거실과 윗방이 나뉘어 있는데 미닫이 문이 있어 큰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윗방에서 자고 거실에서는 그 청년과 엄마가 잔다. 잠들기 전 우리 부대 대원들은 이 시골 청년들의 얘기로 바쁘다. 소곤소곤 끝이 없다. 안 듣는 척했지만 사실 너무 궁금하다. 다들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만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아닌지 궁금하다. 근데 다들 기타 치며 노래하던 이 집 아들한테만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좀 잘생기긴 했다. 기타 치는 것도, 노래도 그 정도면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아침이 되니 닭 울음소리가 경쟁적으로 들려온다. 우리 부대는 식당 당번들이 일찍 일어나 물도 긷고 아침 식사도 준비한다. 더 자고 싶지만 아침 준비 소리에 잘 수가 없다. 일어나 눈을 뜨니 생각보다 너무 상쾌하다. 청진 시에서 매연이 가득한 아침과는 많이 다르다. 이불 정리하다가 쪽지 하나가 뚝 떨어진다. 누가 볼세라 제꺼덕 집어서 숨긴다. 누구지? 누가 밤 사이 편지를 갖다 놨지? 겨우 안정되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한다. 얼른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몰래 읽었다. 그 잘생긴 남자가 나한테 한눈에 반했단다. 그리고 내가 자기의 운명이란다. 그런데 이 편지가 싫지가 않다. 다들 마음 들어하는 남자가 나한테만 편지를 남기다니. 싫을 수가 없다.
농촌에서의 첫날! 첫날부터 이런 일이 있을 줄 상상도 못 했다. 사실 나의 운명은 명국 동무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편지 하나 받고 모든 것이 바뀌는 건 아니지만 내 마음에 명국 동무를 향한 애타는 마음이 잘 느껴지지가 않는다. 이게 맞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