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흔들린 마음이지만 바로 보기 무섭다.
농촌지원을 와서 첫 일을 시작한다. 공사장은 많이 다녀 봤으나 농사하러 온 건 처음이다. 집에서 부모님이 하는 걸 본 적은 있으나 직접 한 적은 없다. 그렇게 두려운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다만 낯설고 그래서 불편할 뿐이다. 모든 생각과 마음이 의도치 않게 얼굴에 바로 표현되는 편이라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좋아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그럼에도 호감의 표시를 보내는 눈빛을 마주할 때는 이상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포전에 나갔다. 우리를 맡은 농장 분조장은 우리 숙소의 그 남자, 손훈 분조장이다.
"옥미 사관장, 오늘은 담배 모종을 심는 작업으로 세 명씩 조를 짜주면 될 것 같소!"
"네 그러죠"
나는 조에 포함되지 않고 싶지만 마지막 조가 딱 두 명이 남는다. 하는 수 없이 조에 포함되게 되었다. 일을 어떻게 하는지는 손훈 분조장이 잘 설명해 준다. 한 명은 이랑에 호미로 구멍을 파고, 한 명은 모종을 놓고, 다른 한 명은 물을 준다. 그리고 한 줄을 다 하고 나면 같이 복토(담배 모종을 곧게 세우고 잘 심는 것)를 한다. 뭐 하나 쉬운 게 없지만 제일 힘든 게 물 긷는 일인 것 같다. 서로 눈치 보며 아무도 물 긷는 건 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일로 여기서 얼굴 붉히긴 싫다. 내가 하기로 한다.
물을 어디에서 길어 와야 하는지 친절하게 손훈 그 동무가 잘 알려준다. 어제 나에게 호감의 편지를 줬다고 무조건 나의 힘든 일을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주변에 괜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긴 싫기 때문이다. 여러 생각을 하며 물이 있는 개울로 가서 10리터짜리 양동이에 물을 담는다. 한 열 걸음도 가지 않았는데 팔이 빠질 것 같다. 앞을 볼 겨를도 없다. 숨이 차오르고 벌써 헉헉 소리가 난다.
"일루 주시오!"
내 양동이를 누군가 확 채 간다. 너무 시원하다. 무거움에서 해방된 자유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좋다. 정신 차리고 앞을 보니 손훈 동무다. 이러면 안 되는데...
한 줄 심기를 다 하고 나서 또 물을 길어 와야 하는데 내 양동이를 주지 않는다. 발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성큼성큼 금방 한 양동이를 길러 온다. 다들 일하느라 바빠서 누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하는지 주시하는 사람은 없어 보인다. 나는 제일 쉬운 복토를 천천히 해나간다. 복토를 해나가다가 물을 다 길어 왔는지 자꾸 확인하게 된다. 그러다 나도 모르게 눈이 자꾸 마주친다. 그럴 때마다 너무 부끄럽다. 그리고 편지에 대한 답장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된다.
쉬려고 온 여기 농촌에서 하룻밤 사이 일로 사랑이라 확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게 한다면 모두 나를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그 동무의 눈길을 마주할 때마다 자신이 없어서 진다. 나는 사랑하지 않는다는 독한 눈빛을 보내고 싶지만 그 생각을 하기도 전에 이미 내 눈빛은 흔들리고 있고 얼굴은 빨개져 있다. 그리고. 나를 좋아한다면서 나한테 왜 말 한마디를 건네지 않는 것인가? 다른 동무들 하고는 너무 말을 잘한다. 그리고 그 동무들은 잘도 웃어준다.
이런저런 생각하면서 일하다 보니 벌써 밥 먹을 시간이다. 일이 힘들어서인지 밥이 참 맛있다. 다들 알아서 잘 먹겠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확인하게 된다. 그러면 안 되는데 그게 잘 안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 힘들어질 것 같아 걱정이 된다. 어떤 일이 있어도 여기서 사랑에 빠져 내 인생을 이 농촌에 맡길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다. 내 마음을 다 잡았다. 이제 더 이상 흔들릴 일은 없을 거야!
힘든 일 끝나고 식사 당번이 해 놓은 저녁 우리는 순식간에 다 먹어 버렸다. 이렇게 맛있을 수가 없다. 자야 하는데 아무도 잘 생각이 없다. 내심 어제저녁과 같은 낭만적인 밤을 기다리나 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어김없이 밖에서 기타 소리가 들리고 노랫소리가 들린다. 용기 있는 몇몇은 나가서 같이 노래 부른다.
푸른 하늘에 달과 별 같이 살고
정든 동산에 님과 나 함께 사네
간절한 이 마음 저 하늘 달빛 같이
영원히 그대만 비치리
저 언덕 우에 꽃들은 피고 져도
이 마음속에 피는 정 변할 소냐
간절한 이 마음 흘러 흐르는 강물 같이
영원히 그대만 따르리
이 노래는 영화에서 나오는 노래였던 것 같다. 양반집 아가씨가 장군이 되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사랑도 이루는 영화였던 것 같다. 그 전쟁 속에서도 사랑을 하다니. 화살이 빗발치고 죽음이 도사리는 곳에서도 사랑을 했다니. 사랑은 분명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노랫소리를 듣고 있었는데 벌써 닭 울음소리가 들린다. 언제 벌써 아침이 와버렸는지. 오늘도 어제 못한 그 일을 하겠지. 그리고... 오늘은 절대 눈길을 주지 말아야겠다. 아침에 일 가는데 어젯저녁 어떤 말들이 오갔는지 다들 야단 법석이다. 무슨 일이 있은 걸까? 우리 부대 여 동무들이 손훈 동무에게 마음에 든 여자가 있냐고 물었더니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다들 그 여자가 누구인지 궁금해서 난리이다. 속으로는 다들 내심 자기이기를 바라는 눈치이다. 뭐 이렇게 인기가 많으니 나 하나 싫다고 해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다.
...
3개월쯤 지났다. 갑자기 부대에서 들어오라는 전보가 왔다. 우리는 급히 짐을 싸야 했고 작별을 해야 했다. 거의 매일과 같이 편지를 보내온 그 동무에게 아무 얘기라도 하고 가야 할 텐데... 걱정이다. 마지막이니 편지라도 한 장 남기고 가자. 무슨 말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다. 사실 다시 안 볼 사이니 모른척하고 가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서 자꾸 아리고 쓰려오는 무엇인가가 나의 마음을 쿡쿡 찌른다. 이미 흔들린 마음이지만 아직 바로 보기가 무섭다.
손훈 동무에게.
안녕하세요. 그동안 여러모로 많은 도움 주신 것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 동무들이 철이 없어서 많이 힘들게 했을 텐데 잘 맞춰주시고 일도 친절히 알려주시고, 재밌는 저녁시간도 마련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그동안 보내 주신 편지들에 대해 답장을 드려야 한다는 것을 아는데 쉽게 답장할 수 없는 심정이어서 편지를 드리지 못한 점 미안합니다. 동무는 참 좋은 동무인 것 같습니다.
다만... 이곳에서의 만남이 운명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미안합니다.
그동안의 감사한 마음을 담아 드릴 것이 이것밖에 없어 드립니다. (세이코 시계)
김옥미 드림.
바래다주는 그 동무에게 남들 몰래 골목에서 슬쩍 건네주었다. 편지와 시계를. 그래 이젠 끝이다. 이 농촌과 이젠 끝이다. 안녕.
집에 오니 내가 없는 동안 명국 동무가 집에 다녀갔다고 한다. 하지만 아버지는 매몰차게 내 쫓아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소식이 나쁘게 들리지는 않는다. 다시 잘해볼 마음이 들지 않는다. 곧 원래의 일상이 시작될 것이다. 어느새 명국 동무는 중대장이 되었고 나는 사관장이라 마주칠 일이 많아졌다. 그를 마주할 일이 불편할 것 같다. 인기가 많은 사람이니 나의 마음을 알게 되면 다른 여자와 결혼하겠지.
부대 복귀 후 만나자는 쪽지를 받았다. 화장실 뒤 두 번째 황철나무에서 말이다. 그를 향하는 발걸음이 담담하다. 이곳을 떠나기 전 왜 나를 찾지 않았는지, 왜 자신의 집에 나를 소개하지 않았는지 등 여러 서운한 마음들이 전혀 서운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렇지 않게 이제 마음이 없다고 말할 일만 남았다. 교과서에 나오는 잘생긴 사람의 정석 그 명국동무를 마주한다.
자신의 집으로 인사 가자고 한다. 하지만 나는 무감정의 표정으로 그러지 않겠다고 딱 잘라 말하고 바로 숙소로 돌아왔다. 그렇게 기다리던 말을 들었는데 나는 왜 반갑지 않았을까?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안 가겠다고 했을까? 사실 이 순간 내 마음의 대부분은 손훈, 그 사람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데 편지는 왜 그렇게 딱 잘라 썼담.
부대에서는 왜 갑자기 돌아오라고 한 건지 아무 설명이 없다. 곧 다른 팀을 묶어 농촌지원을 보낸다고 한다. 어떻게 소문이 났는지 다들 간다고 난리이다. 그래 다들 잘 다녀와라.
그리고 나는... 그 동무를 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