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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별 Toni Feb 15. 2022

길이 나에게 선물한 남자

미국인 남편과 결혼 10주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뜨거운 햇살이 가득 담긴 사진 속에서, 남편과 내가 다정하게 웃고 있다. 햇볕에 그을린 피부가 황금빛으로 반짝인다. 이민자 거리라는 역사적인 배경과 함께 형형색색의 건물들로 유명한 라보카 카미니토 거리의 한 벤치에 앉아서 찍은 사진이다. 원색의 페인트로 칠해진 알록달록한 건물들과 대조적으로, 남편과 나는 단정한 흰색 티셔츠를 입고 있다. 이민자들의 닳고 닳은 세월이 고스란히 녹아있을 건물들은 덕지덕지 칠해진 페인트 아래에 숨어서 거리에 넘쳐나는 관광객들을 구경하고 있다. 그들의 애환을 달래주던 구슬픈 탱고 선율이 들려온다.


  이 거리에서, 순백의 신혼부부였던 우리는 그저 행복해 보인다. 오로지 순수하고, 사랑스럽다. 신혼여행으로 남아메리카 대륙까지 날아갈 정도로 거침없었던 시절이었다. 십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는 동안 우리도 좀 닳아버리고, 좀 울고, 늘 멈칫하게 될 거라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사진 속의 남편과 나는 그저 평온하기만 하다. 


  

  사람들은 내가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 두 번 놀란다. 첫 번째로는 외국인이라는 점에 놀라고, 두 번째로는 나이가 나보다 일곱 살이나 어리다는 사실에 더욱 놀란다. 그 순간 나의 존재는 별 볼일 없는 아줌마에서 갑자기 능력자로 승격이 된다. 그들의 눈동자는 어느새 호기심으로 반짝이고, 이어지는 질문은 한결같다. ‘어떻게 만나셨어요?’ 그러면, 나는 쑥스러운 표정으로 아주 간결하게 대답한다. ‘예전에 영어 강사로 일하던 시절에 남편을 만났어요. 둘이 같은 직장에서 근무한 건 아니었고, 남편이 일주일에 한 번 제가 사는 동네에서 일을 시작하면서 종종 만나게 되었어요. 그러다 보니 서로 좋아져서 사귀게 되었어요.’ 이렇게 대답을 하고 나면, 영화 같은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사람들의 표정에는 살짝 아쉬움이 묻어난다.


  사실 내가 하고 싶은 대답은 그게 아니다. 머나먼 태평양을 건너 내게로 와준 파란 눈의 미국인, 그가 어떻게 내 삶을 구원해주었는지, 그리고 특별한 ‘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지만, 누구에게도 자세한 이야기를 들려준 적은 없다. 이 이야기를 시작하려면 나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야 하고, 짧게 요약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태어난 곳은 미로 같던 좁은 골목길이 거미줄처럼 얽혀 있던 달동네였다. 그 ‘길’은 가난하고, 왁자지껄하고, 혼란스러웠다. 달동네에서의 삶이 고달팠을 부모님은 싸우고 또 싸웠다. 결국 사춘기 시절 그 달동네에서 이사를 나올 즈음 어머니가 홀로 집을 떠나버렸다. 가만히 돌이켜 보면 나의 ‘길’에 대한 열망은 바로 이 달동네에서 시작된 게 분명하다. 미로 같던 길 위에 빼곡히 늘어선 집들은 대문짝을 활짝 열어재낀 채 삶의 민낯을 거침없이 내보이고 있었다. 내가 선택되어 태어난 그 ‘길’은 바로 애환으로 가득 찬 유구한 삶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길은 곧 삶이라는 사실을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배워서인지, 길은 내게 항상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왔다. 오래되고 낯선 길을 걸을 때면, 늘 알 수 없는 감정들로 마음이 묵직해졌다. 그 묵직한 울림이 좋아서 결국은 대륙을 건너 더 먼 세상으로 길을 떠났다.


  남편은 이런 내가 좋아서 사랑에 빠졌다고 하니, 우리를 이어준 건 바로 ‘길’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은 내가 중국을 출발로 동남아시아를 두어 달 돌아보고 와서는 막 일자리를 잡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날 밤 우연히 만나게 된 남편은 내가 돌아봤던 그 대륙으로 곧 여행을 떠날 참이었다. ‘길’이라는 공통분모 속에서, 조그마한 동양 여인이 자신보다 덩치 큰 배낭을 메고 용감하게 세상으로 나서는 모습이 멋져 보인다고 남편이 말했다. 나 역시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연애를 시작했는데, 연애와 결혼은 다르다는 현실을 알기에 이 사랑이 결혼까지 이어지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었다. 


  연애를 하면서 내가 일곱 살이나 많다는 사실에 별로 놀라지 않았던 것처럼, 청혼을 받고 아버지의 열세 평짜리 조그마한 아파트를 처음 함께 방문했을 때도 남편은 별로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면접을 볼 때도, 연애를 할 때도 늘 문제가 되었던, 그래서 억울하지만 감추고 싶었던 나의 배경마저 나의 일부로 사랑해준 남편 앞에서, 나는 단번에 당당해졌다.


  남편과 함께 한국의 여러 길을 돌아봤다. 미국으로 여행을 처음 떠났을 때에는 꿈에 그리던 붉은 황무지를 원 없이 밟아 봤다. 끝없이 펼쳐지는 선인장의 행렬에 미친 듯이 좋아서 날뛰었다.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본 후 남미로 신혼여행을 떠나자고 제안했을 때도 남편은 흔쾌히 동의했다. 이제 홀로가 아닌 둘이서 평생 낯선 길을 밟아보며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들떠 있던 시절, 그때는 십 년 후의 삶 같은 건 예측할 겨를도 없이 마냥 즐겁기만 했다.


  남미, 부에노스아이레스, 라보카 카미니토 거리의 추억을 담은 사진은 십 년 후, 한국, 경산, 어느 아파트 방 안의 책상 위에 쓸쓸히 놓여 있게 된다. 사진이 꽂혀 있는 진녹색 액자의 위쪽 테두리 위에 ‘신혼여행?’이라는 큼지막한 글자가 선명하게 적혀 있다. 열 살 딸아이의 짓이다. 도대체 언제 이렇게 매직으로 낙서를 해 놓은 것일까? 거침없이 길을 나서던 연인은 이렇게 결혼을 하자마자 임신을 하고, 한 아이의 부모가 되고, 집을 사고, 오래도록 한자리에 눌러앉는 운명을 맞이하고 말았다. 


  지난 십 년 동안 수많은 결정들이 오고 가고, 막중한 책임감에 짓눌리고, 아이 때문에 힘든 일들을 겪고, 부모님들이 아프시고, 주변에서는 이혼을 결정한 커플들의 소식도 들려왔다. 좀 닳고, 좀 울고, 멈칫하던 시간들이 지나는 동안 그래도 웃을 수 있었던 건 바로 남편의 유쾌한 성격, 변함없는 사랑과 배려 덕분이 아닐까 싶다. 결혼할 때는 잘 몰랐었는데, 알고 보니 남편은 참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워낙 왜소한 데다가 늦은 나이에 출산을 해서 육아가 정말로 힘들었을 때, 남편의 역할이 컸다. 함께 아이를 돌보았고, 아이와 놀아주는 것도 대부분 남편의 몫이었다. 


  아이에게 좋은 엄마가 되어주지 못하는 것 같아 죄책감이 들기 시작할 즈음 잠자고 있던 나의 내면 아이가 스르르 잠에서 깨어났다. 직접 자식을 낳아 보니,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럽기만 한데, 부모님은 나에게 어떻게 그러실 수 있었을까, 부모로부터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 나 역시 아이한테 잘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자책하며 내면 아이와 함께 울고 있을 때, 나를 꼭 안아준 것 역시 남편이었다. 남편은 내게 부모와도 같은 존재였다.


  사춘기를 뒤늦게 겪고 있는 예민하고 까칠한 사십 대 중반의 부인을 아내로 둔 결혼 십 연차 미국인 남편, 십 년 동안 살면서 하나둘씩 드러난 부인의 본모습에 속았다고 분해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은 눈에 콩깍지가 떨어지지 않아서 부인을 예쁘다고 여기는 무한 긍정의 남편, ‘시키면 다 한다’ 모드로 온갖 집안일에 전문가인 남편, 미니멀 라이프에 심취하신 부인의 명령을 받들어 무거운 가구를 수시로 옮기거나 내 다 버리고 DIY 고수가 된 남편, 부인이 침울해하면 알아서 떡볶이를 사다 주는 남편, 부인과 함께 영화를 보다가 가끔 훌쩍이는 남편, 모임에서 술이 살짝 들어가면 부인에게 눈으로 하트를 날려 보내어 주위의 부러움을 사게 만드는 남편, 수제 맥주를 맛나게 만들어 대령하는 남편, 동네에서 가정적이고 예의 바른 외국인이라고 소문난 남편, 그리고, 그 옆에서, 고마운 줄 모르고 잔소리를 하는 아내. 결혼 십 연차 국제가족의 모습!


  결혼 십 주년이 된 날, 남편과 새 출발의 의미로 결혼반지를 새로 맞추었다. 남편은 눈에 콩깍지가 벗겨질지라도 반지를 맞췄으니 십 년은 나랑 더 살겠다고 농담처럼 다짐했다. 가끔은 정말로 남편이 나를 떠날까 봐 두려울 때가 있다. 그런 마음이 들 때면 잘 대해줘야지, 사랑하는 마음을 행동으로 표현해야지 결심하다가도 어느새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다.



  남편은 지금 건너편 일인용 소파에 앉아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며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남편은 모를 것이다.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 내가 수십 번도 넘게 남편의 얼굴을 힐긋거렸다는 것을. 그러면서 과거를 넘나들고, 되새기고, 반성하며, 얼마나 감동하고, 고마워했는지를. 이 글을 남편이 읽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남편의 한국어 실력은 높지 않다. 지금은 전해지지 못할 이 마음을, 우리가 떠날, 어디일지 알 수 없는 미래의 어느 ‘길’에서 꼭 전하리라 다짐하며 잠시 눈을 감는다. 


  해 질 녘 붉게 물든 아프리카 초원의 어느 바오바브나무 아래에 남편과 내가 나란히 앉아있다. 엷은 미소가 번지는 얼굴이 한없이 평온하다.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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