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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별 Toni Apr 13. 2022

나도 이제 틴에이저

케일라와 특별한 요정

  "엄마, 내 코가 커진 것 같아." 

  아침에 거울을 보다가 흠칫 놀란 케일라가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케일라의 얼굴을 몇 초간 유심히 살펴봤다. 작은 얼굴에 쏟아질 듯 가득 찬 눈, 코, 입이 오늘따라 유난히 커 보였다. 케일라의 말처럼 코가 하룻밤 사이에 좀 커진 것도 같았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고 둘러댔다. 이마에 좁쌀 여드름이 나기 시작한, 곧 만 열세 살이 되는 케일라의 얼굴에는 여전히 천진난만함이 가득했다.

  한 달 전부터 케일라가 다시 코를 찡긋거리기 시작했다. 케일라의 세상에 다시 긴장 요정들이 날갯짓을 하고 있다. 긴장 요정들이 케일라의 마음을 휘젓고 코끝을 간지럽히면, 내 마음에도 불안이 깃든다. 그렇지만 절대 내색하지 않는다. 케일라가 결국에는 긴장 요정들을 스스로 잠재울 것이라고 믿고 기다린다. 새로운 환경들로 가득한 학기 초도 아닌데, 케일라는 지금 어떤 상황으로 마음이 혼란한 것일까.


  초등학교 3학년 첫 학기를 시작할 무렵 케일라가 처음으로 틱 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학교에 다녀와서 간식을 먹고 있던 케일라가 무심코 한쪽 어깨를 들썩였다. 며칠이 지나자 어깨를 들썩이던 행동은 사라졌지만, 이번에는 얼굴을 찡그리기 시작했다. 케일라에게 아무런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살짝 겁이 났다. 틱 증상에 대해 인터넷 검색을 하는 동안, 공포가 엄습했다. 증상이 심해질 경우 음성 틱이 나타날 수도 있고, 성인이 되어서도 고쳐지지 않는 케이스도 있으니 조기치료가 중요하다고 공포를 조장하는 광고성 한의원과 병원 게시글들이 가득했다. 그나마 맘 카페를 통해 엄마들의 경험에서 나오는 진심 어린 조언들을 찾아볼 수 있었다. 

  한 달이 지나도 케일라의 증상은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자려고 누워있던 케일라가 온몸을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몇 분간 간헐적으로 온몸을 들썩이다가, 완전히 잠에 빠져들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평온해졌다. 혹시 뇌에 이상이 있는 건 아닌가 싶어 덜컥 겁이 났다. 그래서 예전에 도움을 받았던 적이 있던 소아정신과 선생님에게 상담 예약을 했다.

  의사 선생님께서 삼 년 전에 처음 만났을 때처럼, 푸근한 얼굴로 우리를 맞아주셨다. 사실 삼 년 전에는 더욱 심각한 상황으로 의사 선생님을 만났었다. 케일라가 유치원생일 때, 피자를 먹다가 양파가 목에 걸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음식을 삼키는 것에 대한 공포가 생기고 말았다. 씹어야만 삼킬 수 있는 음식은 먹으려고 하지 않아서 케일라를 아기 때부터 봐주시던 소아과 선생님의 조언으로, 소아정신과 전문 의사 선생님을 만나 뵙게 되었다. 

  소아정신과를 방문했던 날, 처음 한 일은 일단 아주 긴 설문지에 대답을 적는 것이었다. 대답을 하나하나 작성하면서 그동안 부모로서 내가 얼마나 무지했나 싶어 자책감이 몰려왔고, 의사 선생님께서 호되게 야단치실까 봐 겁이 났었다. 설문지 작성을 덜 했는데도, 의사 선생님께서 불러서 면담을 시작했다. 먼저 케일라에게 그림을 그려가며 식도의 원리를 설명해주시고, 동그랗고 딱딱한 사탕 같은 것 말고는 목에 걸릴 게 없다며 안심시켜 주셨다. 그리고, 케일라에게 지금 뭘 좋아하는지 물으셨다. 케일라가 딸기와 바나나라고 대답하자, 그러면 다른 음식을 먹을 때 딸기와 바나나를 반 섞어서 같이 삼켜보라고 조언을 하셨다. 그렇게 케일라와는 아주 간단하게 면담을 하신 후 진료실 밖으로 내보내셨다. 이어지는 나와 남편과의 상담은 한 시간이 넘게 이어졌었다.

  꽤 긴 시간 동안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선생님의 한 마디가 지금까지도 내 마음에 남아서 길잡이기가 되어주고 있다. '모든 문제에서 중요한 것은 아이와 부모와의 관계인데, 케일라가 부모에게 보이는 태도를 봐서는 서로 관계 형성이 아주 잘 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혀 걱정할 것 없다. 케일라는 감각 발달이 뛰어난 아이라서 작은 자극도 크게 와닿을 수밖에 없다. 지금 섭식 문제를 겪고 있기는 하지만, 부모와 별 문제없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저절로 해결될 것이다. 너무 안달복달하면 오히려 해가 되니, 먹고 싶을 때 그냥 먹게 해라. 절대 굶어서 몸에 이상이 생기거나 하지 않을 것이다. 믿고 기다려라.' 케일라를 위해 받기로 한 상담이었지만, 결국 이 상담은 나를 치유하는 시간이었다. 상담 후에 내 마음속에 존재하던 불안감들, 그리고 평소에 좋은 엄마가 아닌 것 같아서 느꼈던 죄책감들이 많이 사라졌다. 케일라에게 별도의 치료는 필요 없으니, 삼 개월 후에도 상태가 개선되지 않으면 다시 오라고 말씀하셨는데, 다행히 의사 선생님을 다시 방문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었다. 몇 달간 모든 음식을 딸기와 같이 섞어 조금씩 먹으면서 증상이 서서히 개선되었다. 

  틱 증상으로 병원을 방문하기로 했을 때 케일라는 어릴 때 만났던 그 선생님을 기억하고 있었다. 마음이 불편할 때 도와줬던 선생님이라며 어디에 놀러 가는 것처럼 따라나섰다. 선생님께서 케일라에게 학교 생활은 어떤지, 요즘 뭘 좋아하는지, 괴롭히는 친구는 없는지 간단히 물어보셨다. 선생님의 웃는 얼굴과 부드러운 말투는 아이도, 어른도 안심하게 만드는 마법을 가지고 있었다. 케일라가 진료실 밖으로 나간 뒤, 케일라가 틱 증상을 보일 때 촬영했던 동영상을 선생님께 보여주었다. 선생님께서는 지난번처럼 케일라의 증상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해주셨다. '케일라는 지난번에 말했던 것처럼 감각기관이 예민한 아이이다. 그래서 틱 증상이 나타난 것인데, 걱정할 것 없다. 아이들이 자라나는 단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며, 성장 발달이 지속되는 사춘기 시기까지 증상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할 것이다. 증상에 너무 집중하지 말고, 평소처럼 지내라. 혹시 심각해지면, 삼 개월 후에 다시 보자.'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삼 개월 후에 다시 선생님과 마주할 일은 없었다. 조그마한 몸이 힘껏 경직되고 예쁜 얼굴에 주름이 잡히는 것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아팠지만, 결국 가슴이 조마조마했던 인내의 시간들도 끝이 났다.  

  케일라에게 나타난 긴장 요정 덕분에 사실은 케일라와 더욱 돈독해졌다. 집에서도 밖에서도 둘이 열심히 함께 놀았다. 무뚝뚝한 나의 말투를 상냥하게 바꾼 것도 이때부터였다. 뒤늦게 양육과 아이 심리에 대한 책들을 찾아 읽었다. 긴장 요정의 존재를 지켜보는 건 엄마로서 무척 견디기 힘든 순간들이었지만, 덕분에 케일라의 성향을 파악하고 케일라에게 필요한 엄마의 역할이 무엇인지 깨달아나가는 소중한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4학년 새 학기가 시작되었을 때, 틱 증상이 다시 나타나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다행히 아무런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마흔 중반의 담임선생님은 아이들에 대한 사랑과 교육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분이셨는데, 그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선생님의 자상한 보살핌 아래 케일라는 편안한 마음으로 즐겁게 학교 생활을 했다.

  우리 가족은 4학년 한 학기를 끝내고 갑작스럽게 미국으로 이주를 했다. 9월 초,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케일라는 5학년 학생이 되었다. 완전히 낯선 환경에서 능숙하지 않은 영어 구사력으로 케일라가 긴장하고 힘들어하면 어쩌나, 그래서 다시 긴장 요정이 나타나면 어쩌나 걱정을 했었는데,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번에도 좋은 선생님들 덕분이었던 것 같다. 담임선생님과 부족한 영어를 도와주셨던 ESL 선생님 모두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케일라에게 언제나 칭찬과 애정을 쏟아부으셨다. 학부모 면담 시간에, '우리 반이 케일라로 가득 차면 좋겠어요.'라는 선생님의 말을 들었을 때, 정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이렇게 긴장 요정이 영영 떠난 줄 알았는데, 6학년 중반에 다시 케일라가 코를 찡긋거리기 시작했다. 분명 긴장감을 유발한 동기가 있었을 텐데, 코로나 때문에 학교도 가지 않고 집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 도대체 무엇이 원인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지켜보며 며칠이 흐른 후, 담임선생님께 이메일을 받게 되었다. 평소에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던 케일라가 요즘 집중을 잘하지 않는 것 같은데, 혹시 집에 무슨 일이 있는지 물으셨다. 메일을 받자마자 짐작 가는 게 있었다. 케일라에게 혹시 수업시간에 유튜브를 보느냐고 물어봤더니, 그렇다고 대답했다. 화면을 두 개 띄우고 유튜브를 몰래 시청했던 것이다. 잘못을 해놓고 보니 양심의 가책이 들자 불안해지고 결국 몸으로 증상이 발현된 것이었다. 그동안 수업시간에 몰래 했던 잘못을 다 털어놓고 마음이 편해지자, 긴장 요정도 쏙 숨어버렸다.


  현재 7학년인 케일라는 내일이면 드디어 틴에이저가 된다. 동글동글 순하기만 했던 아기가 어느새 훌쩍 자라서 길쭉한 틴에이저가 되었다. '틴'자를 훈장처럼 달고 기대에 부풀어 있지만, 앞으로 케일라의 세상에는 지금보다 더한 혼란과 자극들이 넘쳐날 것이다. 케일라는 지금 환상이 존재하는 어린이의 세상과 현실이라는 새로운 세상의 문턱에 서있다. 자기보다 먼저 그 문턱을 풀쩍 넘어 다른 세상으로 간 친구들을 보며, 며칠 전에는 외롭다고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함께 나무를 타고 놀던 파피는 더 이상 나무 타기도, 역할놀이도 싫다고 하고 엄마 몰래 몸에 나쁜 에너지 드링크를 사 마신다고 했다. 같이 스쿨버스를 타고 다니는 앨리는 이제 버스에서 휴대폰만 들여다보며 점심도 같이 먹지 않는다고 했다. 앨리는 비슷한 부류의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화장을 하고, 유행하는 옷을 입고, 남자 친구 이야기만 한다고 했다. 그웬은 늘 과장된 말과 동작들로 시선을 끌려고 해서 같이 어울리기가 피곤하다고 했다. 함께 깔깔 웃으며 신나게 놀던 친구들이 더 이상 예전의 그 친구들이 아닌 것 같다고 펑펑 울었다.

  여전히 순수하고 동심 가득한 케일라도 조만간 그 문턱을 폴짝 뛰어넘을 것이다. 한 발짝 늦었지만 친구들을 따라갈 것이다. 새로운 세상에는 낯선 경험들이 넘쳐 날 테고, 긴장 요정이 케일라의 코끝을 간질이고 또 간질일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케일라는 한 뼘씩 자라날 것이다. 케일라의 코를 간지럽히는 긴장 요정이 얄밉기도 하지만, 내가 인지할 수 없는 케일라의 마음을 정확히 알려주는 역할을 해서 고맙기도 하다. 긴장 요정이 신호를 보내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맛난 음식 해주고 좀 더 다정하게 말 걸어 주는 것이 전부이다. 케일라의 불안감에 공감해주고, 세상을 헤쳐나갈 강한 힘이 네 안에 있다고 상기시켜주는 것이 나의 역할이다.

   년에 한두 번씩 슬쩍 나타나 며칠 혹은 동안 골탕을 먹이고는 감쪽같이 숨어버리는 긴장 요정이 이번에는 얼마나 머물다가 숨어버릴지 모르겠다.  케일라의 마음속에 자신에 대한 태도, 그리고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가 어느 정도 굳건해졌을 때, 바로 그때, 긴장 요정은 우리를 영원히 떠날 것이다. 지난 여정 동안 애태우던 시간들은 추억으로만 남아 있고, 앞으로 애태울 수많은 시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도 이제 틴에이저의 부모이다. 앞으로 어떤 변화와 사건들이 일어날지 상상할 수 없다. 두려움보다는 기대가 크다. 케일라의 변화를 지켜보는 게 신기하고 신난다. 그 작은 얼굴에 가득 찬 눈, 코, 입이 자꾸 봐도 신기하다. 나보다 긴 다리도 신기하고, 나보다 커진 발도 신기하다. 이마에 난 뾰루지조차도 신기하다.

  그저 부모라서, 케일라 옆에 함께 할 수 있어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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