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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검은별 Toni Aug 22. 2023

맛보다는 외로움을 달래려고 한인 식당에 가지

미국의 한인 식당

몇 주 동안 우울했다.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가서 정신없는 와중에 문득 하던 동작을 멈추고 먼 산을 바라보는 횟수가 잦아졌다. 안도의 한숨 말고는 한숨이라는 걸 별로 내쉬어본 적이 없었는데, 남편이 내게 요즘 왜 한숨을 쉬냐고 물어보며 염려했다. 그리고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옆집 토니가 극찬하던 뉴저지의 한국 식당 주소를 알아왔다고 했다. 나 때문에 토니가 오랜만에 그 식당에 가봤다고 했다. 주인이 바뀌었는지 아닌지, 맛이 그대로인지, 그래서 내가 좋아할 만한지 알아내려고 토니가 사전 답사를 간 것이다. 옆집 토니와 수지 부부까지 합세하여 나를 걱정해 주는 게 고마우면서도 미안했다.

지난해 여름 한국에 다녀온 후 일 년이 지났다. 그래서 향수병이 도진 것일까. 혼자서도 잘 놀지만, 일 년 동안 나도 모르게 차곡차곡 쌓인 외로움의 양이 꽤 되었던 것일까. 가족들과 친구들이 미치도록 그립다. 삼 년이 지나면 미국이 내 집처럼 편안해질 것이라는 조언을 종종 들었는데, 삼 년이 지나도 미국은 여전히 여행지 같다. 삼 년이 지나니 오히려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더 커지기만 한다.

토니가 추천한 뉴저지의 식당은 뉴저지 해변으로 놀러 갈 때 들르기로 했다. 한 시간을 운전해서 한식을 먹으러 가야 할 만큼 절박하지는 않았다. 대신 지인이 추천해 주신 노쓰 필라델피아의 한식당에 가보기로 했다. 아귀찜이 맛있다고 해서 생각만 해도 기분이 들떴다. 딸이 친구 집에 놀러 간 날 저녁 남편과 오붓하게 식당으로 향했다.

식당 문을 열기도 전에 음식 냄새가 풍겼다. 지지고 끓이고 구워진 음식들이 한데 어우러져 최고의 풍미를 자랑하는 것 같았다. 여섯 시 전이었지만 식당에 손님들이 가득했다. 고기를 구울 수 있는 자리가 만석이라서 삼겹살은 포기하고 다른 음식을 먹기로 했다. 찜닭, 낙지볶음, 아귀찜, 감자탕, 대구탕 등등 그리워하던 요리들이 메뉴판에서 춤을 췄다. 모든 메뉴를 다 먹고 싶어서 결정이 어려웠다. 고민 끝에 찜닭을 골랐는데, 한 시간 전에 예약이 필요한 메뉴라서 주문이 불가했다. 남편이 내가 먹고 싶은 것을 고르라고 했지만, 아귀찜도, 낙지볶음도 남편이 좋아하지 않는 것을 알기에 감자탕을 주문했다. 감자탕은 둘 다 좋아하는 메뉴이기는 하나, 사실 내가 먹고 싶었던 건 아귀찜이었다.

할머니가 해주신 것 같은 밑반찬을 하나씩 맛보며 기대감에 가득 차서 감자탕을 기다렸다. 중년의 한국인들로 가득한 식당은 왁자지껄했다. 옆 테이블의 초록색 소주병을 보자, 소주를 한 잔 들이켜고 싶은 마음이 꿀꺽 올라왔다. 벌써 소주 세 병을 비운 옆 테이블 아저씨들을 보자 아버지 생각이 났다. 화사한 색감의 목깃 있는 셔츠를 입고 멋을 냈지만, 햇볕에 그을린 강인한 얼굴을 보니 영락없이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시는 분들 같았다. 아저씨들을 보고 있자니, 내가 있는 곳이 한국인 것 같았다. 머나먼 미국까지 와서 노동으로 삶을 일구신 이들의 사연이 무척 궁금했다.

드디어 감자탕이 나왔다. 기대 반 우려 반이었던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 분명 감자탕 맛이 나기는 하는데, 바로 그 맛이 아니었다. 돼지 뼈에서는 냄새가 나고 고기가 후루룩 쉽게 발라지지 않았다. 깻잎이나 다른 야채가 넉넉히 들어 있지 않았다. 통 들깨가 둥둥 떠다녔다. 결정적으로 무척 짰다. 감자탕 맛이 나니 그거면 됐다고 긍정 마인드를 쥐어짜 내며 감자탕을 먹었다. 음식이 맛이 있건 없건 뭐든지 잘 먹는 남편은 신나서 돼지 뼈를 발라먹었다. 나도 맛있는 척 젓가락질을 했지만, 밥이 잘 넘어가지 않았다. ‘나를 위해 온 식당인데 그냥 내가 먹고 싶은 걸 고를 걸, 그래도 남편이라도 맛있다고 잘 먹으니 됐지 뭐, 그나저나 내 입맛이 까다로운 것일까, 불평쟁이로 변한 내가 참 싫다, 매사에 불평인 내가 참 싫어, 한국에 있었으면 이런 일이 없었을 텐데, 나를 불평쟁이로 만든 미국이 참 싫다, 불평쟁이로 살고 싶지 않은데, 불평쟁이로 살지 않으려면 내 입맛에 맞지 않는  감자탕이라도 고맙게 먹어야 하는 거겠지, 그나마 한식을 먹을 수 있는 게 어디야, 암, 감사하지, 그래도, 한국 음식이 너무 그리워. 한국이 너무 그립다.’ 밥 한 숟가락을 뜨는 동안 온갖 상념이 머릿속을 휘젓고 다녔다. 내가 이런 상념에 빠져 있다는 것을 모른 채 남편은 감자탕과 사랑에 빠져 정말 행복해 보였다.

먹다 남은 감자탕을 포장해서 식당 밖으로 나왔다. 상가 예닐곱 개와 주차 공간이 마련되어 있는 조그마한 상가 단지를 흑인 청년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대마초 냄새가 공기 중에 떠다녔다. 폐차 직전인 차의 트렁크에서 음악이 시끄럽게 흘러나왔다. 주차장과 상가 사이 땅에는 쓰레기들이 황량하게 뒹굴고 있었다. 크게 위협을 느낄만한 건 없었지만 총기와 강탈 사건이 뉴스를 도배하는 시점이라 살짝 겁이 났다. 청년들을 최대한 의식하지 않으려고 연기하면서 한국 빵집으로 들어갔다. 쌀식빵과 크림식빵, 곰보빵을 골라 계산하는데, 주인이 빵 몇 개를 덤으로 챙겨주셨다. 바깥 정경과는 아무 관계없다는 듯 빵집 안에 앉아 있는 한국인 손님들은 빵과 팥빙수의 달콤함에 빠져 평화로워 보였다.

노쓰 필라델피아에 정착했던 많은 한국 이민자들이 이곳을 떠났다고 들었다. 그 자리를 흑인들이 메꿨다. 한때 번성했던 필라델피아의 한인 상권은 옛 모습을 간직한 채 허름하게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다. 여전히 장사를 하고 있는 약국이 있고, 식당 몇 개가 있다. 그나마 한인마트인 H마트가 꽤 잘 나가는 편이다. 이 동네에 가면 늘 우수에 젖게 된다. 이민자들의 고단했을 정착기, 그래도 왁자지껄 활력으로 가득했을 거리를 상상해 보게 된다.

나를 위로해 주겠다고 남편이 데리고 간 한식당에서 쓸쓸함만 가득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욕구 해소가 아니라 오히려 불만이 늘어났다. 나의 불만은 해결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대를 버리고 나면 그제야 마음에 평화가 오는 것일까. 처한 상황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나면 만족이 찾아오는 것일까. 그래도 사무치는 이 그리움을 내버려 둘 수는 없지 않을까.

곧 뉴저지에 갈 예정이다. 이제 기대 반 우려 반 태도는 버리기로 했다. 기대를 아예 하지 않겠다. 내가 있는 이곳이 내가 있던 곳과 절대 같을 수 없다. 내가 있는 이곳에서 내가 있던 곳을 기대하는 태도를 버리고 한번 가보자, 한식당에. 그때는 꼭 내가 먹고 싶은 메뉴로 고르겠다! 포장해 온 감자탕에 들깨가루와 깻잎을 가득 넣었다. 뼈에서 고기만 발라내서 넣었다.  물을 두 컵이나 추가해 바글바글 끓였더니 간도 적당하고 냄새도 사라졌다. 이제야 제대로 감자탕 맛이 났다. 배도 마음도 간만에 포만감이 가득했다. 외로움이 조금 누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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