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와 상상 독후 실험실
낮 12시. 주로 나는 글을 씁니다. 할 것 놀 것 넘쳐나는 한국이었다면 바깥 활동에 여념 없었을 정오. 내 정오가 달라졌습니다. 한국과 미국의 내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미국에 온 후 밖에 나가는 대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독후감을 쓰고, 에세이를 흉내 내고, 잡다한 일상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혼자 쓰며 노는 게 무료했던 어느 날, 레이먼드 카버가 나를 방문했습니다. 그래서 혼자가 아닌, 레이먼드 카버와 함께 글을 썼습니다. 내 정오가 특별해졌습니다. 외롭지 않았습니다. 삶을 관통하는 글쓰기가 어떤 것인지 체험하며 흥분했습니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에는 열두 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습니다. 각각의 작품이 연극처럼 또렷하게 머릿속에 그려집니다. 레이먼드 카버가 묘사한 장면은 간결하면서 기발합니다. 독자로서 딱 한 장면을 관찰하는 게 전부이지만, 보고 있노라면 한 인간의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뜻대로 살아지지 않아서 막 살기로 한 인생, 혹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평 없이 묵묵히 살아가는 인생이 책 속에 있습니다. 나는 그저 그 인생을 잠깐 스쳐 지나갈 뿐이지만, 쉽게 잊히지 않습니다. 마음속에 여운이 오래 남습니다. 나의 인생도 그들과 별반 다를 게 없으니까요.
그래서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 소설을 소재로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책 속으로 내가 들어가거나, 혹은 책 속 인물이 책에서 나와 내 삶에 끼어들었습니다. 책 속으로, 나의 과거로, 현재로, 그리고 다시 책 속으로 시시각각 이동하며 여러 명의 나를 만났습니다.
그 과정에서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이상한 글이 지어졌습니다. 책을 읽고 생각을 정리한 독후감도 아니고, 그렇다고 에세이처럼 보이지도 않습니다. 허구가 가미된 단편 소설 같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단편 소설이라고 하기에는 미흡합니다. 나는 도대체 무슨 글을 쓴 것일까요?
레이먼드 카버의 책과 나의 글쓰기 욕망이 만나서 상상이 생겨났습니다. 그러자 잔잔했던 내 일상이 특별해졌습니다. 뜻대로 살아지지 않는 하루이지만, 그래도 묵묵히 앞으로 걸어갑니다. 레이먼드 카버의 이야기가 내 이야기를 불러냈듯, 내 이야기가 당신의 이야기를 불러내면 좋겠다고 바랍니다.
“정오의 상상 독후 실험실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을 읽지 않아도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준비했습니다.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 속 인물들, ‘나’인 명희 씨, ‘나’의 남편인 미국인 마틴 씨, ‘나’의 주변 사람들이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여러분의 대답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