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쓰작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검은별 Toni Nov 01. 2024

더 이상 쓰지 않는 일기

동서문학상 수필 부문 맥심상 수상작

쓰작_함께 글쓰기_3.6.2024

소재: 일기

제목: 더 이상 쓰지 않는 일기

빛바랜 일기장이 내게도 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오전, 벽장에서 일기장 4권을 꺼냈다. 누렇게 변색된 종이는 과거지만, 지렁이처럼 꿈틀대는 글자만은 생생하게 살아 움직였다. 징글징글하다가, 다소곳하다가, 삐뚤빼뚤하다가, 해맑다가, 그날그날 기분에 맞춰 글자가 제멋대로 춤췄다. 처음에는 그냥 한번 슥 훑어볼 심산이었다. 첫 일기장 첫 페이지를 읽는 순간, 내 청춘에 사로잡혔다. 그 자리에 앉아서 일기장 4권을 다 읽고 말았다. 17세 여고생에서 27세 청년까지, 가장 아름답던 내 청춘 10년이 공책 4권, 4시간 분량으로 남아 있었다. 별것 없다고 생각했던 내 청춘이 여느 소설보다 재밌었다.  내가 특별해졌다.

의도한 건 아니지만, 27세부터 17세까지 거꾸로 시간 여행을 했다. 호주 시드니에서 일기가 시작됐다. 새 인생 살겠다고 호주까지 가서도 갈팡질팡 고민하는 명희 씨가 등장했다. 시드니 어학원에서 만난 다린 선생님께서 명희 씨를 좋아하고 격려했다. 꿈과 재능을 쫓으라고 자꾸 부추겼다. 같은 반 학생으로 만난 히로는 배우처럼 잘생겼다. 명희 씨와 우정을 나눴다. 서핑하는 K와 아주 짧은 연애를 했다. 명희 씨는 여전히 명희 씨였다. 소심하고 생각이 많았다. 

명희 씨가 시드니를 떠나 여행에 나섰다. 그러면서 서서히 바뀌어 갔다. 명희 씨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밝아지고 당당해졌다. 자존감이 하늘을 찌르게 됐다. 다시 만난 히로, 다시 만난 한국인 룸메이트 동생 케빈, 멋진 한국 친구들, 천사처럼 아름다운 독일 친구 해닝, 일본 친구들, 개구쟁이 캐나다 친구 닉, 에어즈락에서 우정을 나눈 가이드 탐, 여행 중 도움을 줬던 호주 현지인들, 농장에서 만난 피지 아줌마와 호주 할아버지 등 명희 씨에게 영감을 준 수많은 사람들이 일기장에서 살아났다. 그때처럼 똑같은 얼굴로 환하게 웃어 주었다.

다음에 펼친 일기장에는 25살 청춘이 담겨 있었다. 명희 씨가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S는 여러 페이지에 등장했다. 늘 S 생각을 했나 보다.  100% 완벽한 이상형이라고 생각했던 F와의 우정은 달달했다. 오랜 우정을 나눈 선배 O, 명희 씨에게 멋진 어른 같던 O 선배가 정략결혼을 앞두고 방황했다. 멋진 어른이 왜 불행한 결혼을 선택한 것인지 이해되지 않고 실망스러웠다. 명희 씨가 잠깐 좋아했던 A 씨는 착한 명희 씨를 놓아 주었다. 알고 보니 바람둥이 선수였다. 착한 명희 씨에게 바람둥이 작업을 하는 대신 아끼는 동생으로 대했다. 책, 영화 이야기가 많았다. 반 고흐를 만났다. 부자 사장이 차 사준다고 꼬시면서 애인이 되어 달라고 했다. 충격에 빠졌다. 25살 일기장에는 감성이 충만했다. 아름다운 문장들이 수두룩했다. 이걸 내가 썼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인생에서 창작의 절정은 25세가 아닐까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26세 일기장도 25세 일기장 만큼 감성이 충만했다. S를 잊겠다며 결심하고 또 하고, 100% 이상형과 간간이 만나 책 이야기를 했다. 직장 일로 만난 서울 남자 B가 적극 애정공세를 했다. 그 달콤함에 넘어갈랑 말랑할 때, 이 남자가 유부남이라는 걸 알게 됐다. 죄 없는 남자의 아내와 통화를 했는데, 아내가 명희 씨에게 계속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B는 모든 걸 다 버리고 명희 씨를 선택하기로 했다면서 거짓말 같은 말로 호소했다. 첫 단편 소설을 써서 당선됐다. 광주 FM 라디오와 인터뷰를 했다. 그리고 두 번째 단편 소설을 썼다. O 선배가 명희 씨의 글을 읽고 놀랐다. 20살 꼬맹이가 언제 이렇게 컸냐며 감동했다. (내가 읽은 '사랑의 기술'이라는 책이 O 선배가 빌려준 책이고, 이 책을 내가  5년 후 돌려줬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사장이 월급을 몇 달째 주지 않았다. 치기공사 C 씨가 명희 씨가 좋다며 따라다니다가 명희 씨의 집안 배경을 알고 연락을 끊었다. 한참 후 다시 만났을 때 치기공사 말했다. 치과 차트에서 집 전화번호를 찾아서 집으로 몇 번이나 전화를 했지만 연결되지 않았다고 했다. 집안 배경 때문에 연락을 끊은 게 절대 아니라고 했다. 

마지막 펼친 일기장에는 고등학생 명희 씨가 등장했다. 공책 한 권이 마구 휘갈겨 쓴 글자로 가득했다. 정말 힘든 시절이었음을 짐작하고도 남았다. 부모님께서 싸우고 싸우다가 결국 이혼을 한 시기였다. 명희 씨는 이때만 해도 엄마가 그리웠나 보다. 엄마가 보고 싶다, 엄마도 아빠도 불쌍하다는 말이 애처롭게 적혀 있다. 더불어 가출하고 싶다, 외롭다, 슬프다 온갖 절규가 넘쳐났다. 그런 절규 마무리에는 꼭 주님을 찾았다. 힘든 시기였지만, 재미난 일도 많았다. 긴 머리 새침데기, 조그마한 명희 씨를 좋아했던 교회 동생들이 한 무더기 등장했다. 사고뭉치 문제아 J, 기타 치고 노래하던 멋진 리더 I,  소심하지만 직설적으로 좋다며 편지를 수도 없이 보냈던 G,  티격태격 틈만 나면 시비를 걸던 K. 명희 씨가 힘들 때 명희 씨를 웃게 만든 순수한 남고생들. 

 그리고, 정말 좋은 친구로 남았을 수도 있었던 H와의 일화가 몇 개 이어졌다. 어른 같고, 건달 같고, 잘 생겼고, 과묵한 스타일이었던 H는 명희 씨에게 일탈을 꿈꾸게 했다. H를 따라 호프집에 가서 첫 맥주를 마셨다, 그것도 교회 끝나고.

내 과거는 사라졌는데, 일기에 담긴 명희 씨는 늘 현재에 산다. 일기 속 명희 씨는 참 순수하고 착하다. 그래서 고리타분하기도 하다. 일기 속 명희 씨에게 말해주고 싶다. '잘 봐. 너는 절대 혼자가 아니야. 너를 아끼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조금만 열어 봐. 받으려고 하지 말고, 제발 좀 줘 봐. 기회를 잡아.'

그렇다. 조금만 덜 범생이처럼 살았다면, 그냥 막 저지르고 살았다면, 친구들에게 마음을 더 활짝 열었다면, 일기 속 나의 외로움과 불평이 좀 줄어들지 않았을까? 내 삶에도 사람이 있고, 사건이 있고, 활기가 있었는데, 잡지 못하고 놓친 것들이 이제야 보인다. 고맙고 미안하다, 모두에게.

삶의 분출구였던 일기를 더 이상 쓰지 않는다. 호주가 마지막 일기장이었다. 무엇 때문에 일기 쓰기를 멈춘 것일까? 그 후로도 내 삶에 환희와 좌절이, 우정과 사랑이, 들끓는 감정이 이어졌는데 말이다.

일기를 쓰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타인과 소통하는 방법을 터득했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심지어 자매에게도 속마음을 터놓지 못하던 내가 뒤늦게 말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부끄러워서 내 배경을 감추고 내 본심을 감췄다. 미련하게 자존심 하나에 매달렸다. 재잘재잘 수다 떨며 온갖 비밀을 털어놓는 사이, 이런 걸 가져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할 줄 몰랐다. 

서른이 다 되어서야 나다움이 뭔지 알게 됐다. 솔직하게 됐다. 그래서 다 까발렸다. 마음이 편했다. 내가 까발리면 상대방도 묵은 속내를 까발렸다. 걱정을 털어놨다. 언니, 여동생, 친한 친구, 동네 엄마들, 심지어 처음 만나는 사람과도 허물없이 이야기했다. 그들이 내 일기장이고 내가 그들의 일기장인 것이다. 그것도 내 말에 대답하는 일기장! 정말 좋지 아니한가!

지금은 블로그에 간간이 글을 남긴다. 탁탁탁 키보드로 타이핑하는 글은 일기와는 좀 다른다. 분출하는, 날 것이어야 할 감정이 정제되어 있다. 반쯤 맞고 반쯤 거짓이다. 박제된 글은 반쯤 살아 있고 반쯤 죽어 있다.

다시 일기를 쓸 날이 올까. 일기장에 명희 씨를 살려 놓고 싶을 때가 올까. 30대 40대의 명희 씨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명희 씨와 함께 한 마틴 씨와 케일라가 어땠는지 벌써 기억에서 가물가물하다. 그립다.  

매거진의 이전글 17회 동서문학상 수상 소감 / 수필 부문 맥심상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