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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지한

기묘한 날이었다. 글을 쓰기 위한 박동의 엇박자도 느껴지지 않고 그저 평온히 지나가는 그런 하루였다. 마치 너무 평온해서 도처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루의 끝에서야 "평온했는데?"라고 자각하는 하루였다. 뭐. 이런 날도 있어야지. 만약 신이 있다면 악마마저도 포용했을 테니, 피조물에 불과한 내게 매일이 가혹하게 작동하도록 내버려 둘리가 없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번 달 안으로 단편 하나와 기행문 하나를 완성하기로 스스로 다짐했는데 이렇게 평온한 날이라니. 불안을 느낀다.

생활에서도 창작에서도 빌빌거리기 시작한다. 망가진 것을 부정하지 않기로 하자. 흐름을 따라 종이에 말을 건다. 회답도, 반송도 다 나의 몫이 아니다. 타인의 평가와 긍정은 더더욱 나의 몫이 아니다. 기묘한 하루를 마주하면 언제나 흐름도 난해한 고민들로 그날의 일기를 망친다. 망쳐도 어쩔 수 없이 그대로 써야 한다. 그게 재능과 정신의 진실이기에.

온갖 고민으로 밤을 지나면 찾아오는 아침이라는 것. 영문도 모르는 것들이 자꾸만 일상으로 밀려든다. 소박하게 내다 버린 것들이 아침을 타고 하나둘 방 안으로 침범한다. 소나기가 내리듯 아침이 지나간 자리는 침수당한 방처럼 난장판이다.

아직도 나는 경우를 모른다.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경우도, 생활을 유지하지 않을 경우도 몰라서 잠자코 누워 있는다. 그나마 재주를 좀 부린다고 글이나 좀 써재끼고 있지만, 글월 조금 쓴다고 밥을 벌어먹기엔 요원하다. 방에 누워 멀거니 천장을 바라보다 보면 어디선가 때 묻은 작업복을 입은 사내가 다가와 말을 건다. 능청스럽고 유쾌한 몸짓으로 다가와 "어이구, 괜찮으십니까?" 하면서 웃는 낯으로 다가와 너스레를 떨며 말은 건다. 사내의 몸짓과 복장에 나는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젓는다. 그러면 사내는 금세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진다. 사내가 사라져도 나는 일어날 줄을 모른다. 자리에 가만히 누워 있는 것으로 하루치 인생의 답안지를 세상에 내민다. 낙제는 쉬운 일이다.

석양이 뉘엿뉘엿해질 때까지 누워 지내다, 간신히 해가 세상에 걸쳤을 때, 자리에서 일어난다. 담배를 문다. 한 대의 담배가 다 타기도 전에 해는 사라지고 세상이 적막해진다.

내가 피운 연기는 해와 나 둘 중 누구의 조의였을까. 생각을 굴려봐도 답이 나오지 않을 때, 그제서야 담배의 불이 꺼진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 방에 눕는다. 누워서 다시 사내의 얼굴을 마주하고 슬픈 낯을 짓는다.

뭐라도 좀 써야 될 텐데, 작가가 되고 싶다고 자랑자랑 했던 각오가 무색하게 아무런 문장도 떠오르지 않는다. 앞서 말한 평온이 멋대로 정신에 틈입하듯이 문학이 멋대로 완치판정을 받으려 한다. 분명 오늘 하루는 평온했는데 끝나기 직전에 모든 가벼움이 무게를 가지기 시작한다. 작가도 직장인도 그 무엇도 아니기에, 이런 무게엔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짓눌린다. 맞서지 못할게 뻔하니 다시 과거로 멀리멀리 도망친다.

오랜만에 찾아본 유년의 만화영화엔 주인공의 활약보다 부모님의 보조가 더 눈에 들어온다. 어른의 제국 속에서 아이로 돌아가는 게 죄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분만 참으면 살고 싶어 질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친구에게 돈 말고 다른 가치나 행복은 없을까 하고 은밀히 나의 중요한 가치를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철저히 무시당했다. 이데올로기. 자본주의대로 흘러가는 세상인데 돈을 배제하고 다른 곳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믿다니. 생각해 보면 그런 말 하는 사람들은 철저하게 스스로를 방기하고 있거나 이미 부의 끝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돈을 벗어난 행복을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거지이거나 부자이거나 아니면 죽을병에 걸렸거나 완치되었거나 둘 중 하나라는 것이다. 애석하게도 이런 것들은 겪어본 적 없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스스로의 불행과 절망의 보호막에 가장 흔하고 안전한 재료를 사용한다. 금전. 돈을 벗어나려고 돈을 번다니 슬픈 사람들. 모든 도덕적 해이와 악행들 반인륜적인 행태에 대한 꾸지람에 제일 쉽고 완벽한 방어는 '그래서 너 얼마 버냐?'이 한 문장이면 끝이다. 아무리 논리적이고 보편적인 도덕으로 무장해도 결국 싸움의 승자는 임금과 자산이 높은 사람의 승리다. 지루하고 무시무시한 세상이다. 한 가지 물감으로 세상을 칠해보라는 꼴이다.

많은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는데, 이제는 다 내던지고 싶어진다. 아직 일하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는데, 아직도 쉬고 있냐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나 스스로가 거지가 된듯한 환상이 보인다. 충분히 하루를 보낼 돈이 있다. 당장 큰일이 닥쳐도 변통할 금액이 통장에 있다. 모든 경제활동에 제동을 걸고 웅크린다. 결과는 비록 비난과 동정뿐이었지만. 타인의 평가와 멈춰버린 동력에 평온한 일상을 갈아 넣는다. 다시 스스로를 진심으로 미워한다. 더는 멈출 수 없는 지점까지 와버린 것 같은데, 스스로에 대한 살의를 멈추지 않으면 아무래도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요원한 일이다.

여름엔 겨울이 그리웠고, 겨울이 되니 벚꽃이 보고 싶다. 아무래도 살고 싶어진 것 같다. 만화영화의 내용처럼, 끝에 닿은 인생에 희망이 섞여 있으리라 믿는다. 그러나 만화영화가 원하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이미 다 자라 버린 어른이기에 까만 엔딩크레딧이 마지막에 존재하는 것을 명징하게 깨닫는다.

담배를 끊을까. 자의적으로 처음 금연의 의지를 내뱉는다. 그러나 그건 역시 나한테 못할 짓인 것 같아서 이내 포기해 버린다. 방안에 너무 뿌옇게 연기가 쌓이는 것 같아서 창문을 연다. 10년을 세 번이나 겪어버린 신체의 산천은 이제 추위를 견디기엔 노쇠해 버렸다. 올해 겨울은 예년보다 훨씬 추운 것 같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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