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by 밤톨맘

서랍장을 활짝 열어둔 채 잠시 고민에 빠진다. 산미가 있는 원두가 좋을지, 바디감이 묵직한 원두가 좋을지. 이리저리 드립백 봉투에 적힌 테이스팅 노트에 적힌 설명을 찬찬히 읽으며 정말 ‘복숭아 맛이 날까’ 기대하며 컵에 걸어 끼운다. 물을 쫄쫄 흘려보내면 환상적인 향이 나를 감싼다. 이런 순간은 내게 꼭 필요한 시간이다.


분명 엄마도 좋고, 아내도 좋고, 딸도 좋지만 나를 표현하는 어떠한 호칭이나, 내게 기대되는 어떠한 역할 없이 나라는 사람을 꺼내놓기 딱 좋은 시간이다. 엄마가, 아내가, 딸이 버거울 때가 있다. 한줌의 먼지가 되어 사라지고 싶은 순간들이 존재한다.


그럴 때마다 여행을 떠나는 상상을 한다. 요즘처럼 날이 더운 날에는 보통 그 상상이 이탈리아 아말피 해변과 카프리 섬 안에서 이루어진다. 강렬한 햇살을 받으며 레몬첼로 한 잔을 곁들이고 하늘을 나는 듯 두둥실 떠다니며 걸어 다니는 상상. 온통 이질적인 풍경 아래에서 그 어느때보다 해맑게 웃는 나를 그린다.


여행이란 어디에도 소속되어 있지 않는 자유로움 그 자체다. 어쩌면 이 자유로움을 갈망하기에 우리는 비행기에 올라타는 것은 아닐까? 나의 20대 어느 여름에 다녀온 이탈리아가 그랬다. 그 시절은 왜 그렇게 불안했는지. 거리를 하염없이 서성일 수 있는 이 자유로움이 좋다가도, 도시 곳곳을 여행하던 중, 지하철에 몸을 싣고 출근하는 직장인들을 보며 부러운 시선으로 한참을 머물렀다. 어디에 소속되어 그저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곳으로 가기만 하는 그들이 부러웠던, 취업이 참으로 힘들었던 때였다.


하지만 무한한 자유로움도, 그렇다고 무한한 소속감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아니다. 그저 주어진 삶을 살다가 원할 때마다 잠시 여행을 떠나면 된다. 그래서 '비행기모드'는 언제든 'on', 'off'로 전환 가능하다.


그래서 이곳, <밤톨맘은 비행기모드입니다>라는 공간은

어디로 향할지 모르는 여행 이야기일수도 있고,

어느 오후나 해질녘의 잔상일 수도 있고,

책속에서 마주한 밑줄 친 문장 하나에 머물렀던 마음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나의 솔직한 감정들이 담길 수도 있다.


곧 엄마로, 아내로, 딸로 돌아갈 테지만, 잠시 '비행기모드'로 쉬어갈 예정이다.

이 공간에서 여러분도 잠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롯이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