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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된 사람 Nov 03. 2021

취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존중받은 선택의 축적된 경험

"언제쯤 도착해?"

온다는 연락을 받고 나면 더 기다릴 수밖에 없는 법.

저녁 6시에서 7시 사이 도착이라고 몇 번을 알려줘도 안달이  났다.

도리의 짖는 소리를 듣고, 아이와 나는 동시에

"드디어 오셨나 보다!"

슬리퍼도 제대로 신지 않고 후다닥 마중을 나갔다.


기사님의 늠름한 트럭 화물칸에 마지막 배송지인 우리 집의 벙커침대 자재들이 실려있다. 동지로 나아가는 11월의 시골 초저녁은 이미 밤이 깊다. 마당의 불을 켜고, 기사님께 아이 방을 안내해드렸다.


온갖 실험재료

ㅡ이를테면 마당에서 퍼온 흙, 길 가다 주워온 돌, 학교에서 챙겨 온 플라스틱 통들, 각종 쓰레기로 보이지만, 어엿한 실험재료들 비교적 너른 방인데도 금세 난장이 되었다.

정리 좀 하자는 매일 반복되는 잔소리를 줄일 수 있도록 시스템을 개선해보기로 했다.


1안. 침대를 치우고 이불을 사용한다.

2안. 벙커침대로 바꾼다.


비용과 안전으로 1안으로 꼬셔(?!) 보았지만, 결국 의논 끝에 2안이 채택되었다. 채택된 의결사항을 세부적으로 집행하는 첫 단계. 벙커침대 고르기!

여러 사정들로 미루어지다 '이웃집 나들이'로 실행은 급물살을 탔다. 벙커침대를 실물로 보게 되니 아이는 선택에 확신이 생긴 듯했다.


더는 지체할 수 없어 '폭풍 검색'에 돌입했고, 몇 가지를 추려 아이에게 제안했다. 나는 굳이 '돈'때문이라기보다 제한 하중이 120kg인 철제로 된 제품이 더 튼튼해 보였다. 나의 원픽을 아이에게 보여줬다.


다른 것도 한번 살펴보자


책장과 서랍이 아래로 들어가야 하므로 '하부 높이는 120cm 이상일 것'을 조건으로 함께 살펴보았다.

그 결과, 아이는 내가 고른 제품 가격의 세 배쯤 되는 원목을 선택하였다.

아불싸! 나는 가격 제한을 두지 않았던 것이다. 약간의 당혹감을 누르며 선택의 이유를 물었다.

계단이 튼튼해 보여서!

명확한 근거에 딱히 반박할 명분이 없었다. 또 이제와 가격 제한이라는 조건을 걸면 선택을 위해 들인 수고를 무시하는 행위인 것 같아 눈을 질끈 감고 결제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도착한 벙커침대는 기사님의 노련한 기술로 하나씩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아이는 방문에 서서 자신의 선택 실물로 구현되는 현장을 내내 지켜보았다.


8살이지만 아직 잠자리 독립을 하지 못했던 아이가 오늘 아침, 중대 발표를 하였다.


나, 이제부터 혼자 잘게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로 채운 공간을 가진다는 것은 세상 속 자궁을 가지는 것과 같다. 누구에게도 침범당하지 않는 1평 남짓한 자신만의 공간으로 다시 세계로 연결할 힘을 채울 수 있다. 나의 자궁에서 독립한 아이는 자신의 취향으로 자기만의 자궁을 구축하였나 보다.



숨은 뒷 이야기 하나 더!

도서산간지역까지는 아니더라도 조금 외진 농촌지역이라 기사님께서 추가 배송료 2만 원이 부과됨을 알려주셨다. 어디까지나 나는 아이에게 선택에 따른 책임을 알려줄 의도로써, 아이가 그간 모아놓은 자신의 용돈으로 2만 원을 지불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조금 강한) 제안을 하였다. 제안받을 당시에 약간의 머뭇거림은 있었으나, 설치를 마친 기사님께 피카츄 지갑 속의 2만 원을 꺼내 '고맙습니다'는 인사와 함께 지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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