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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된 사람 Nov 09. 2021

추수감사절 고백문

아직 거두어 들일 것이 없는 나에게 보내는 응원과 격려


샬롬

오늘은 추수감사절이네요.

절기를 안내하신 바람님의 톡을 보고, 한 주 동안 추수할 것을 찾으려 나의 들판을 둘러보았습니다.


작년 10월 말에 시작한 건물 리모델링 작업이 올 6월에 완료하였고 그 공간에서 새로운 일을 하며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지난주에는 단막극 장소로 섭외받아 이틀에 걸쳐 공간을 대여하는 즐거운 경험도 했습니다. 천덕꾸러기 같던 건물이 사랑받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고자 했던 목표에 한 걸음 다가간 것 같습니다.


그 공간에서 나는 '여럿이 잘 사는 꿈'의 조력자 역할을 자처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여럿'은 떠나고 혼자 남았으며, 원망과 미움에 힘든 시간도 있었지만 지금은 이리될 수밖에 없었구나라는 점을 알게 되어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오랜 시간 편견과 왜곡으로 쌓은 어설픈 가치관이 민낯을 보았고, 진짜를 외치던 내가 가짜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없는 '여럿'은 없었고, '자신의 욕망'을 배제한 '꿈'은 모래성이었습니다.


내 안의 있는 그대로의 욕망을 만나지 못한 이유는 '금기어'가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해야 하는 것'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로 채워진 머릿속에 마음의 아우성이 자리할 공간은 없었습니다. 해야 하는 것과 하지 말아야 하는 것들로 앙상하게 구성한 삶의 선택지들은 번호만 다를 뿐, 대동소이한 모습이었습니다. 나의 이력은 비슷한 내용들을 이름만 달리 하여 채워져있었습니다. 철저하게 혼자된 지금에서야 내 앞의 빈 들판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심고, 내가 돌보아야 하는 나의 들판입니다.


이제야 나의 욕망을 진지하게 마주했습니다. 나는 무엇을 하든 어디를 가든 열정적으로 살아왔지만.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남이 요구하는 것을 내 안에서 찾아 보여주려 노력하던 시간이 훨씬 길었던 터라 이제는 내 생각인지, 남 생각인지 분간이 안 되는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그래도 혼자 남겨지는 사건이 커다란 돌덩어리로 던져져 '나'라고 착각한 덩어리에 금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의 균열이 어려운 것이며 한 번 갈라진 틈은 속도가 문제일 뿐 반드시 갈라질 것입니다. 남의 것을 내 것으로 착각하는 것인지 온전한 내 것인지 흔들리는 것도 머지않았음을 믿어봅니다.


끝으로. 나는 올해 추수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지난 토요일 처음 매출 0원을 기록했습니다. 하나도 팔지 못한 날인데, 그날 오후에는 드라마 촬영 장소로 식당을 빌려주었습니다. 음식 판매만 매출로 놓고 보면 참담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다른 씨앗은 싹을 틔우고 있다는 것을 목격한 날이기도 합니다. 실패에 익숙한 여럿들과 의기투합하여 새로운 희망을 함께 만들자며 호기롭게 출발했던 봄은 뜨겁고 들뜬 여름을 지나 추수를 앞둔 늦가을을 빈 손으로 맞이합니다.


마늘(의성 한지형)은 10말과 11월 초 즈음에 심습니다. 쪽을 나눈 마늘을 한알씩 땅이 겨울잠에 들기 전, 그 품 안으로 마늘을 밀어 넣습니다. 마늘을 심은 밭에 비닐이 깔려있지 않다면 아마도 아무것도 심지 않은 밭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렇게 마늘은 땅의 품 속에서 함께 겨울을 보냅니다. 미동도 없이, 싹을 틔워야 한다는 자신의 본분을 잊은 듯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채로 3개월이 흐릅니다.


그러나 봄이 오고 있음을 제일 먼저 알려주는 이는, 뜻밖에도 마늘입니다. 2월 중순이 지나면 본격적으로 마늘에서 싹이 올라옵니다. 싹을 틔운 순간부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오로지 성장과 성숙으로 나아갑니다. 뜨거운 여름이 오기 전인 6월 하지에는 마늘을 수확합니다. 곧고 단단한 마늘 줄기와 흙 사이를 파고든 뿌리 사이에 보랏빛을 내는 육쪽마늘이 있습니다. 육쪽에서 떼에낸 한알의 마늘이 자라 육쪽의 무리를 지어 돌아왔습니다.


나의 지금은 흔적도 표시도 없지만, 이윽고 봄이 되면 싹을 틔우고 마침내는 무리와 함께 돌아올 것입니다.

열심히 살았지만, 도무지 이루어 놓은 것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 당신도 이 사실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꾸역꾸역 살아가는 날도 있지만, 그러다 보면 어느새 새싹을 만나기도 한다는 것을 우리 꼭 기억하기 바랍니다. 여기까지 왔음에 감사드리며 초라하며 찬란한 나의 고백을 마칩니다.

  

*일러두기
내가 다니는 교회는 기독교장로회 소속의 교인 30명 남짓의 작은 곳입니다. 우리 교회력은 11월 첫째 주를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있습니다. 각자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 말고, 삶의 방향성이나 자신의 정체성을 담은 이름을 지어 부릅니다. 참고로 저는 '보라'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라'라는 뜻입니다. 제가 지은 것은 아니지만, 아직 이름값을 덜해 그대로 사용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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