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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된 사람 Nov 14. 2021

무엇이 진짜인가요

아르떼 뮤지엄 여수에서 철학을 길어 올리다

무조건 이곳을 가야 했다.

빌딩 한가운데 바다를 데려다 놓은 이들이 전시관을 개관하였다는 것을 며칠 전에야 알았다. 당장 제주까지 가고 싶지만, 현실적인 문제들로 8월에 개관한 여수로 향했다. 토요일 식당 영업을 마친 후, 우리는 여수로 향했다. 경북 안동에서 출발하여 전남 여수에 도착한 데 걸린 시간은 약 4시간 30분. tmap 기준이니 휴게소를 두 군데 들른 시간 등을 합치면 5시간은 꽤 걸린 것 같다.    


파도(wave) d'strict

  

이 긴 거리를 달려 도착한 우리들의 목적지는 단 한 곳이었다.


아르떼 뮤지엄 여수  Arte museum


이곳을 꼭 가야 했던 이유는

첫 째, 현상을 배제하고 본질에 집중한 창업자 그룹의 선택이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시대를 앞선 Live park의 부진으로 집단적 좌절에 놓인 d'strict. 그러한 와중에 수장을 잃은 창업자 그룹의 선택이 놀라웠다. 관련 이력이나 해당 분야 학력 등 어지러운 요건은 지우고 오직 '조직 회생'의 임무를 가장 잘 수행할 인물이 누구인지에 대한 본질에 초점을 맞추었다. 공인회계사로서 대체복무 근무로 입사한 d'stirt에 정식 입사하여 빠른 기간에 이사까지 오른 이성호 씨에게 대표직을 제안하였다. 내게는 이성호 대표의 행보도 신선하였으나, 그의 역량을 알아본 창업자 그룹의 안목과 태도가 깊은 인상을 남겼다. 0에서 무언가를 만든 사람은 반드시 생성된 결괏값에 대해 애착이 생긴다. 애착이 집착으로 바뀌는 순간, 본질이 파괴되는 것을 우리는 흔히 볼 수 있다. 내 자식이라 내 욕심대로 하고 싶고, 내가 만든 조직이라 내 뜻대로 끌고 가고 싶다. 애착과 집착의 경계는 실금 같은 정도이나 이 실금을 알아차리고 넘지 않으려는 실천은 매우 어렵다! 그래서 자식 키우기 힘들고, 조직의 1세대들이 쉬이 물러나지 않으려는 것이다. 여담을 하나 하자면, 아이에게 애플의 '팀 쿡'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스티븐 잡스가 죽은 후, 새롭게 애플을 이끄는 리더라고 설명했다.



팀 쿡은 스티븐 잡스 아들이야?


8세 아이에게도 창업자에서 그 아들로 이어지는 가족경영이 익숙하다. 그러니 0에서 1을 만든 이들이 애초에 '1'을 만들고자 한 목적에 천착하여 이 '1'을 다시 '0'으로 대할 수 있는 단순 명료한 자세가 내 마음에 꽂혔다. 내가 1을 만들었다는 공명심과 그로부터 생기는 이익을 챙기려는 사심 없는 행동이 어떤 파장을 만들었는지 그들의 창작물을 통해 느껴보고 싶었다.



둘째,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허물고 싶었다.

귀농을 선택한 가장 큰 이유는 복잡하고 치열한 중심에서 벗어나 상대적으로 여유로운 변방에서 아이에게 자신과 자연을 탐구하며 유년기를 보낼 수 있도록 보장해주려는 것이었다. 도심 한복판에 사는 또래 조카나 친구들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시간과 공간적 여유가 풍부하다. 학교를 매우 좋아한다는 것으로 설명은 충분할 것 같다. 역시 교육을 위해 귀농을 선택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에 뿌듯하던 찰나, 아이에게 이상 행동을 감지했다.



다른 애들은 안 해. 나만 해



친구들과 뛰어놀기도 매우 좋아하지만, 동시에 책도 매우 좋아한다. 7세 때부터 핸드폰에서 검색하는 방법을 알려주고 주말에는 '미디어 데이'로 지정해 가급적 자유롭게 텔레비전 보기, 핸드폰 검색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활자로 된 책을 보다가 미디어 데이로 유튜브에 관련 내용을 검색하여 해당 영상들을 정독하다시피 한다. 그렇게 본 내용들을 직접 따라 해보기도 하고 더 알고 싶어 책을 찾아본다. 기르던 장수풍뎅이가 죽었을 때, 박제를 직접 하는 모습을 보고 감탄했다. 여기까지 보면 참 부러운 남의 집 아들이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아이의 지적 탐구활동을 함께 해줄 친구가 없다는 점이다. 작은 학교를 다니는 많은 학부모들이 하소연하는 내용 중 하나는 아이의 취미를 공유할 친구가 없다는 것이다. 전교생 열댓 명 정도의 학교에서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는 축구를 할 수 없고, 조금 특이한 친구는 그 관심사에 대해 대화 나눌 친구가 없다. 학급 인원이 총 6명(그나마 전교 학년 중 가장 많은 학년)이다 보니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친구를 만날 확률이 상대적으로 낮다. 이러한 이유로 많은 가정이 귀도를 하기도 한다.


아이가 곤충과 파충류에 관심이 많고, 책을 좋아하는 것은 사실 별로 특별할 것이 없다. 좋아하는 것을 더 알고 싶어 책과 영상을 찾아보고, 실제로 경험해보는 것은 건강한 태도이다. 양육에 있어 가장 노력한 점이기도 하지만, 아이는 부모와의 교감도 좋지만 또래 친구와 활발하게 나누지 못하는 아쉬움이 큰 것 같았다. 아쉬움이 깊어졌는지 외로움과 소외감을 호소하는 횟수가 잦아졌다.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는 것과 무리와 달라 특이하게 여기는 것은 다르다! 나 역시, 특이하다는 소리를 하도 듣다 보니 어느새 스스로를 특이하게 여기며 남들과 비슷해지려고 노력한 시기가 있었다. 잃어버린 나의 20년이다.


아이에게 '우리가 속해있다고 믿는 시간과 공간이 허구일 수 있다'는 것을 전하고 싶었다. 시간은 각자가 속한 세계의 기준과 잣대에 따라 저마다의 모습으로 흘러간다. 4차 산업혁명과 메타버스에 적응하여 이미 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여전히 이장님이 일일이 농정 관련 혜택을 알려줘야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우리는 모두 2021년에 살고 있으나, 시간의 속도는 내가 소속해 있다고 믿는 공간의 기준으로 흐르고 있다.


아이뿐만이 아니었다. 남편 또한 급격히 봉건적으로 보수화 되어 갔다. 시골 아재들 틈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의 속에 있던 각종 거친 성향들을 끄집어 올렸다. 그리고 극대화해나갔다. 2차에 노래방을 가지 않는 꽤 괜찮던 팀장님은 남들 앞에서 욕설도 입에 올리는 아재가 되어있었다. 나로서는 남편의 변화를 지켜보는 것이 가장 괴로웠다.



나답게 살자고 왔는데, 나를 잃어버렸구나



귀농의 목적과는 다른 오류들이 나타난 혼란의 틈 속에 나는 끈질기게 내게 물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이 나를 나답게 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리고 어렴풋이 답을 뱉었다.

선, 악, 미, 추 내 안에 모두 들어있다. 모두 나다. 다만 내가 속한 공간을 무엇으로 정의하느냐에 따라 그에 어울리는 태도를 갖추는 것일 뿐이다. 우리는 나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나를 만난 것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정의하는 내가 바로 나다.



아르떼 뮤지엄 여수


아르떼 뮤지엄 여수는 1박 2일을 들여 가기에 충분했다!

그 공간을 들어서는 순간, 우리는 바다와 숲과 별과 정글을 탐험했다.

그리고 남편은 명화의 감동에 압도되었다. 명화의 향연을 넋 놓고 바라보는 남편의 뒷모습에서 소년이 보였다. 아이는 내 핸드폰을 들고 이리저리 사진을 찍었다. 아이가 잡은 찰나는 무엇일까.


미디어로 재구성한 자연이었으나 웅장한 그 파도와 폭포 앞에서 우리는 이것을 가짜라 부를 수 있는가라는 대화를 나누었다. 짙은 동백꽃의 황홀경을 가짜라 할 수 있는가.

남편은 포즈를 취해보라고 하면 꼭 영상을 잡으려는 시늉을 하였다. 동백꽃은 실재하지 않으나 남편에게는 이미 실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삶도 결국, 이와 같다.

전시관을 나와 여수 앞바다에 앉아 붕어빵을 먹었다. 그야말로 장자의 나비꿈을 한바탕 꾸고 나온 것 같았다.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것 같은 압도적인 전시물을 보며 나는 삶이 한바탕 꾸는 꿈이라면, 영겁의 세월 중 불과 어느 한순간이라면 기왕이면 아름답게 만들고 싶다는 욕망을 품었다.


남편과 아이가 자신들의 경계를 확장했는지 아니면 허물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우리들의 다음 여행지는 '포스코'이다. 아르떼 뮤지엄을 가는 길에 만난 광양-여수 산업단지 불빛이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를 떠올리게 했고 그 이야기는 산업 역사에 까지 이어졌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이가 '포스코'에 가보고 싶다는 의견을 냈다. 포스코의 역사와 공장을 둘러볼 수 있는 견학 프로그램을 신청했다. 이번에는 집에서 2시간 거리밖에 안 되니(!) 가볍게 하루 일정으로 다녀 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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