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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된 사람 Nov 18. 2021

기싸움

굴러온 돌의 통과의례

1. 사건의 서막


우당탕탕.

식당 주방에서 일을 하던 중, 밖에서 무언가 충돌로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무슨 일인가 싶어 창으로 고개를 내밀어 밖을 보니 우리 식당의 측면 간판이 부서졌고 저 앞에 화물칸의 덮개를 높게 개조한 1톤 트럭이 골목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저 차는 조금 전 식당 앞에 있는 슈퍼의 처마를 박아 파손시킨 바로 그 차였다. 마침 구경 나온 슈퍼 사장님에게 가서 가해 차량의 연락처를 알고 있는지 물었다. 사장님은 잔뜩 상기된 목소리로 트럭 운전자는 골목 안의 뻥튀기 가게에 배달을 온 차량이라며 제보해 주셨다. 뻥튀기 가게 여사장님도 우당탕 소리에 구경을 나와 있었다. 나는 뻥튀기 사장님에게 차주의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하였다.

뻥튀기 사장님은 가게로 돌아가 남편에게 사건을 알렸고, 그분은 차주에게 직접 연락을 하셨다. 시간이 흐른 뒤 차주가 현장에 나타났다.


차주와 뻥튀기 가게 여사장님이 함께 오셨다.

차주: 나는 사고가 난지 몰랐어요.

나: 이렇게 다시 돌아오지 않으셨다면, 뺑소니로 처리될 수 있었어요.

뻥튀기 가게 여사장님: 보험 처리한다잖아. 가만히 있어.

나: 빨리 처리해주셔야 해요. 사람들이 다니는 길이라 낙상사고가 날 수 있어요.


가만히 있으라는 뻥튀기 사장님의 어이없는 문장을 가볍게 스킵하고 나는 우려사항을 분명히 전달하였다. 그 뒤, 차주는 동네의 주차된 차들에 욕을 퍼부었고, 두 곳에나 피해를 입혔지만 미안해하기는커녕 다시는 이 골목에 오지 않을 거라 욕을 섞어가며 말했다. 그 욕을 듣고 싶지도, 듣고 있을 이유도 없어 식당으로 들어왔다.


잠시 뒤, 보험사건 접수 담당자가 현장에 도착했다. 나는 낙상사고 위험이 있으니 빠른 처리를 재차 부탁하였다. 담당자는 오늘 중으로 해결하겠다고 했다.

이렇게 불쾌하지만, 되돌릴 수 없는 일을 잘 마무리한 줄 알았다.


2. 신입의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 기싸움 한바탕


뻥튀기 가게 여사장님이(이하 뻥튀기) 돌아왔다.

식당 문을 열고, 밖에 선 채로 말했다.


뻥튀기: 간판을 좀 위로 달아. 큰 차가 계속 앞으로 들어올 거 거든. 이번에 달 때 위로 달든가 떼든가.


도저히 저 문장은 가볍게 스킵할 수 없었다. 나는 주방을 나와 뻥튀기 앞으로 갔다.

나는 가만히 있으면 안 되었다. 이 분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가게를 오픈했을 당시에도 저렇게 문을 열고 들어와

지도 않은 채


뻥튀기: 아니, 왜 떡을 안 돌리노. 하도 옆에서 물어봐서 내가 와봤다.


이렇게 폭탄을 던진 사람이었다. 개업 떡이라는 것을 받으면 좋은 일이지 받지 않았다고 개업 첫날 당당히 문을 열고 따져 물을 일은 아니었다. 일면식도 없는 그가 보무도 당당히 문을 열고 서는 다짜고짜 개업 떡의 향방을 물을 때 어이가 없었지만, 동네 신입으로써 상냥함을 장착하여 오늘은 첫날이라 어수선하여 주중에 천천히 돌릴 예정이었다고 설명하였다. 떡을 먹고도 이 분은 식당을 이용하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내내 반말이셨다.


나: 간판을 위로 달든, 떼든 그건 저희 식당이 결정할 문제예요. 보험 담당자랑 처리 얘기했어요.

뻥튀기: 이웃끼리 얼굴 붉히고 그러지 말고, 좋게 하자는 얘기지 뭐. 내 말투가 원래 이래. 이해해.


유감스럽지만, 나는 그를 이해할 생각이 없다.

오랫동안 같은 자리, 같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터를 잡은 이들이 새로 들어온 사람에게 대하는 밀어내기와 따돌림은 유치하고 굳건하다. 어느 집단이나 조직에서든 먼저 자리 잡은 자들이 신입을 향한 필터링은 조직의 안전을 위한 무의식적인 행위라고 애써 포장하려면 포장할 수 있으나, 사실 그냥 '텃세'다.

엘리 H. 라딩어의 <늑대의 지혜>에는 한 무리의 늑대가 떠돌이 수컷 늑대를 받아들이는 장면이 나온다. 약간의 경계와 시험을 거쳐 떠돌이 늑대를 무리에 받아들인 후로는 기존 무리와 동등한 대우를 한다. 텃세를 뚫고 그들 사이에 자리를 잡으려면 '기싸움'은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다. 이때 받은 통관 점수가 그 조직 내에서의 포지션을 결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만한 대상인가 아닌가.




귀농 후 옆 마을로 땅을 구해 집을 지었다. 건너편 집을 방문한 같은 동네 아줌마는 그 집의 마당에 차를 대지 않고 꼭 우리 집 마당에 차를 댔다. 급기야는 그 건너편 집을 방문하는 모든 차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 집 마당에 차를 대고 그 집을 방문하였다. 좋은 게 좋은 것일지, 할 말은 하고 살 것인지 기로에 선 순간이었다. 나는 할 말을 하는 편을 택했다.


나: 여사님~ 차 좀 빼주세요.


최대한 예의를 갖춰 상냥하게 말했다. 내 집 앞에 차 빼 달라는 얘기를 이렇게 조심해서 할 말인가 싶지만, 동네 평판을 주무르는 원주민들의 눈 밖에 나고 싶지 않은 이주민의 서글픈 노력이었다. 귀농으로 배운 것 중 하나는 만만한 대상으로 포지셔닝한 젊은 사람은 하루가 매우 바쁘다는 것이다. 동네 어른들의 온갖 부탁과 수발을 들다 보면 내 밭을 돌볼 시간이 없기도 하다. 심지어는 남 일 쫓아다니느라 바빠서 다른 부탁을 늦게 처리하면 도와주고도 욕을 먹는 경우가 허다하다. 귀농에 앞서, 나는 남편에게 이 사실을 단단히 일렀다. 그리고 내가 악역을 담당하겠노라 결심했었다. 사회적 체면과 관례 때문에 거절이 어렵다면, 아내가 유별나다는 핑계를 대라고 했다. 내가 못돼 보이는가! 그래도 좋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동네 호구'가 되거나 적응하지 못하고 '귀도'를 하게 된다. 나는 이곳에 살려고 왔고 건강하게 살아가려면 원주민-이주민, 노인-청장년은 그 나이와 배경에 관계 없이 서로 대등한 눈높이의 이웃이 되어야 한다.


집을 짓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 안에서 '뻐적-'하고 밖에서 무언가 갈라지는 소리가 들렸다.

밖을 나가보니 건너집 어르신의 물건을 납품받으러 온 5톤 탑차가 길을 빠져나가지 못하자, 우리 집을 짓고 여분으로 마당에 쌓아놓은 ALC 블록을 임의로 가져다 수로 위를 덮은 모양이다. 블록이 차량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서지는 소리였고, 하마터면 트럭이 우리 집 방향으로 기울 뻔하였다.


소리를 듣고, 놀란 내가 밖으로 나가자 뻥튀기와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어르신: 이웃지간에 좀 갖다 썼다. 우리는 니꺼 내꺼 없이 사니깐. oo엄마 괜찮지?


아니요. 저는 안 괜찮습니다. 뻥튀기와 건너편 어르신의 공통점은 본인의 물건과 공간에 대한 소유권은 분명하다. 단지 (만만한) 다른 사람의 소유권만을 애매하게 대하신다는 점이다. 길이 지적도보다 좁아진 이유는 건너편 어르신이 길가의 텃밭을 조금씩 넓혀왔기 때문이지만, 우리가 새로 집을 지으며 수로를 복개하면 좋았다는 평가를 하셨다. 하-참, 이런 류의 대화는 신선한 접근이 끝도 없이 나온다.


이사해서 자리 잡은 지, 올해로 3년 째다. 이제 동네 주민 통과의례는 거쳐간 것 같다. oo엄마는 만만하지는 않지만,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평판 점수가 자리를 잡았다. 때마다 먹거리를 나누고 명절 인사를 따로 챙긴다.


3. 한바탕 그 후

간판 보수 공사를 진행할 건축 사장님이 오셨다. 길 한 복판에서 편안히 대화를 나누었다. 사장님은 공사 과정을 어떻게 그렇게 잘 아냐고 하시며 말미에는 잘 마무리할 테니 염려 말라며 명함을 건네셨다.(슈퍼 사장님에게는 주지 않았다.) 골목의 수많은 눈과 귀들에게 내가 만만하지 않다는 신호를 보내듯 찌그러진 간판 앞에서 대화를 나눈 것이다. 유치뽕짝 싸움판에 찬란하게 대응하였다.


어딜 가나 굴러들어 온 돌의 처음은 처량하고 안쓰럽다. 채 뿌리내리지 못해 흔들거리는 자신을 붙잡기도 벅차지만 박힌 돌들의 만만치 않은 저항도 버텨내야 하기 때문이다. 동네건 조직이건 간에 각종 선배들에게 신입인 내가 바랐던 것은 친절과 지도편달이 아니었다. 나도 선배의 어렵게 쌓은 지식, 커리어, 노하우 등을 홀랑 빼먹는 약은 신입은 아니다. 다만 신입에게 하기 싫은 일감 떠넘기기, 이제까지 아무에게도 요구하지 않던 것을 신입에게 받아내려는 것 등의 호구 잡으려는 못된 심보를 거두어주십사 하는 것이다.


그러거나 어쨌거나 나는 내일도 가게문 열러 나간다.  한바탕 휩쓴 오늘의 사건이 골목길 선배님에게나 나에게나 유익한 방향으로 흐길 바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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