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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늦된 사람 Mar 09. 2022

만학도의 첫 등교날

20년이면 강산이 변하고도 남지...

2019년 가을, 거듭된 농사 실패에 울컥하고 뭔가 솟아올랐다.

농업기술센터에서 시키는 대로 하고 잘해보려고 할수록 잘 안 풀리는 것이 답답했다.

시골살이를 하면  할수록 시스템이 오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조금과 농가대출 없이는 농업 경영이 사실상 불가능한 구조였다.

(물론! 억대 농부도 계시고, 그렇지 않은 분들도 계신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억대 농부에게는 그만큼의 보조금과 농가대출 규모가 있더라...


좌/우를 막론하고 농업인 단체의 주장과 방향이 실정에 맞지 않거나 특정 부류에 편파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나만의 뇌피셜인지, 다른 길은 없는지 모색하고 싶었다.

그러다 덜컥 대학원에 입학원서를 냈다. 

현장의 경험을 가진 이가 이론을 탑재하면 좀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에 모래알만큼이라도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2000년대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5년 가까이 시간이 흐른 지금, 

농업경제학과에 진학하려니 겁은 좀 났지만 당시에는 호기롭게 냈다. 

덕분에 약간의 성적장학금을 받고 입학할 수 있었다. 

학부시절에도 받아본 적 없는 성적 장학금이라니..

늦은 공부를 격려하는 차원인가? 하는 생각을 했지만, 아무튼! 입학했다.


그러던 찰나 2020년 2월, 우리를 혼돈의 세계로 끌어당긴 코로나19가 터지고!

비대면으로 진행되는 수업을 이해하기가 벅차 바로 휴학을 냈다.


그렇게 2년이 흐른 지금, 

온갖 인생사가 펼쳐지더니 이제야 첫 학기 수업을 시작하였다.

등교 준비는 좀 남달랐다. 

혹시 교수님보다 나이 들어 보일까 봐 염색을 했다.


그리고 대망의 첫 등교날!

2시간 여를 달려 학교에 들어서니 얼마나 설레던지.

파릇한 청춘들이 하나같이 이뻐 보이고, 동시에 나는 약간 위축되기도 했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젊음의 기운을 얻어가는구나 하며 신이 더 났다.


현타가 오기 시작한 건

면접을 봤던 건물이 아니라 휴학한 2년 사이 새로 생긴 건물을 찾는 것부터였다.

건물 앞에 다다르자 모바일 학생증의 큐알코드를 찍어야 건물 입구의 문이 열렸다. 

가장 저렴한 휴대폰 요금제인 나의 느린 데이터 속도가 야속할 따름이었다.

부랴부랴 찾아들어간 강의실,

지각이다...


칠판에 웬 숫자가 적혀있길래 일단 메모를 했다.

그 숫자의 의미는 다음 강의 때에 비로소 알게 되었다.

친근하게 이름을 불러주는 교수님은 없었다. 이제 자신의 스마트폰으로 스마트하게 출석을 체크하는 것이었다. 칠판의 숫자는 출석 인증번호였다.


나의 느린 데이터는 마지막 수업 때, 누가 가장 스마트한지 하지 않은지 보자며 교수님이 환하게 띄운 칠판 화면 덕분에 가장 늦은 출석 인증으로 가장 나이 많고, 스마트하지 못한 학생임을 증명하게 만들었다. 


이런 것쯤이야..

격세지감이라며 얼마든지 적응하고 버텨나갈 수 있다! 

(암.. 그렇고 말고)


문제는 경제학이 수학을 바탕으로 한다는 것이다!

나는 고등학교 문과-당시 문과에서는 미분, 적분을 가르치지 않았다.-였으며, 학부는 국어국문학과로 살면서 함수를 다시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혹시라도 이 수업이 이해되지 않는다면
전공을 잘못 택한 것이니 잘 생각해보세요.

 

강의 중 교수님의 한 마디가 도둑이 제 발 저린 심정으로 괜히 뜨끔했다.

나를 두고 하신 말씀인가?....


쉬는 시간, 옆자리의 학생이 (고맙게도) 말을 걸어줬다.

자기도 수업이 어렵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99학번 선배의 전화가 걸려왔는데 이 학생은 99년생이란다.)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학부 전공자인 다른 학생이 

따로 공부하면 좋은 과목과 책, 유튜브 강의를 추천해준다.


집으로 돌아와

경제학의 정석이라는 이준구 교수님의 '미시 경제학'과 연습문제를 주문했다.

당연히 유튜브의 관련 강의 영상도 찾아놨다.


마음속에 솟구치는 상념은 어쩔 수가 없다.

석사를 무사히 마쳐도 43살...

이른바 '파트타임 대학원생'인 나는 이 경주를 무사히 마칠 수 있을까?

어디에 써먹으려고 시간과 돈을 들이고, 남편과 아이의 지원을 받아 여기까지 왔을까?


어차피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시작은 했고, 그러면!

기왕에 시작한 여행길 끝까지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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